"유년의 기억" 기억에는 순서가 없다. 책장을 넘기듯 차례대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두서없이 한 사람의 생각을 하다가 관련된 다른 사건으로 생각이 흐르고, 때로는 당시 상황이 아주 또렷하게 떠오르기도 하지만 다른 때는 그저 그때의 분위기, 느낌만이 어렴풋이 되살아날 뿐이다.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기억으로 관통된 소설'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전체적으로 한 소년의 성장기-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일관성없이 넘나들며 전개된다. 우연처럼 문득문득 환기되는, 겹치고 반복되는 기억의 편린.
가난한 집안의 둘째, 집안 사정때문에 5년간 다른 집의 양자로 가야 했던 소년.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외톨박이 '손광림'은 한발짝 물러서서 주변 세상을 바라본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와 죽을 때까지 자식에게 신세지지 않으려 애쓰던 어머니의 모습, 누구보다 씩씩했지만 결국엔 현실에 절망해 초라해져버린 큰형과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야 했던 막내동생. 소년의 가족들이 빚어내는 하루하루는 우스꽝스럽고 희극적으로 과장되지만, 가슴 한켠 뜨거운 감정을 끓어오르게 만든다.
굴곡이 심한 이야기들이 이어지지만, 작가의 어조는 의외로 담담하다. 돌이킬 수 없는-이미 지나버린 시간이기 때문일까. 기억속의 풍경을 한장한장 넘겨보는듯,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위화 자신의 유년시절의 느낌과 이해가 온전히 녹아든다.
아이는 어른들의 위선과 이중적 태도, 아름다움이 얼마나 쉽게 시드는가 하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속에 유유히 흐르는 생명의 소리를 숭배하며'사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 또한 배운다. 부박하고 고단한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생의 여러 가지 모습을 대면한다.
작가의 첫 번째 장편인 때문인지, 날것같은 깨달음과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도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투박함이 오히려 더 뭉툭하고 커다란 감동으로 오래 남을듯 하다. 작가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그저 '기억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행복의 느낌과 쓰라림의 느낌'이랄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 박하영(200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