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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병국

출생:1980년, 대한민국 인천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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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포기하지 않는 마음>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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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
1.
김영산의 시는 여러 겹의 꽃잎처럼 중첩된 사유를 담고 있다. 절대적 주체의 자리에서 대상을 재단하지 않으며 다양한 의미와 맥락에 기댄 상대적 주체로서 우주문학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확장된 장소’ 또는 ‘흐르는 장소’에 머문다. “한 곳에 있지만 먼 곳으로 움직”이며 “아름답지만 아름답지만은 않”은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죽음을, 우주를 가로지른다. 첨예한 서정의 감각으로 풀어낸 그의 시적 여정이 만개한 꽃들이 되어 빛난다.
2.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2025년 1월 2일 출고 
고경서 시인이 재현하는 존재는 “부재의 숲”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부조리함으로 인해 취약함에 내몰리지만 그렇다고 위축된 상태로 삶을 방기하지 않는다. 시인은 소외된 욕망의 구조에서 벗어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불가능성을 욕망하고 향유하려는 움직임을 통해 세계를 살아내는 삶의 간절을 기록하고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 곡절한 감각이야말로 우리 삶의 실재임은 분명하다.
3.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31일 출고 
정두섭 시인의 첫 시집 『마릴린 목련』은 유쾌한 재담 이면에 현실적 고통을 배치하여 그 실감을 우리 삶의 공통감각으로 확장하여 펼쳐 놓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적 언어가 품고 있는 말맛의 유쾌는 어딘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를 불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기형적인 삶의 실재를 마주한 것만 같아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불편의 감각은 김수영 시인이 시 「거대한 뿌리」(1964)에서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라고 한 것처럼 삶의 진창과 마주하고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하는 한편 삶에 내재한 인간의 존엄과 고투를 신뢰하고자 하는 정두섭 시인의 시적 수행으로 말미암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정두섭 시인의 시는 기형적인 삶을 강제하는 세계의 부조리함을 향한 비판과 죽음을 전유한 생의 욕망을 현시함으로써 인간을 긍정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기형적 구조를 전복하려는 불온함으로 충만하다. 시인이 불온함을 위한 시적 장치로 사용하는 것은 골계(滑稽)이다. 알다시피 골계란 익살이나 우스꽝스러움, 농담과 유머 등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는 미적 범주의 하나로 숭고와 비장, 우아와 함께 예술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미적 가치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조동일은 자신의 문학 연구 방법론을 명시한 여러 저서를 통해 문학작품에는 있어야 할 당위와 있는 것으로서의 현실이 서로 융합하거나 상반함으로써 조화와 갈등의 관계를 이루어 각각의 미적 범주(우아미, 비장미, 숭고미, 골계미)를 결정한다고 했다. 이중 골계미는 당위보다 현실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우아미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지만 조화보다는 갈등과 대립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비장미와 친연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덧붙여 조동일은 골계를 해학에 해당하는 부드러운 골계와 풍자에 해당하는 사나운 골계로 구분하면서 전자는 인간성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고 후자는 경화된 규범의 파괴로 나아간다고 설명했다. 해학은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 긍정을 지향하는 것으로 대상을 배척하지 않고 관조적인 자세로 감싸 안는 너그러움에 초점을 놓지만, 풍자는 불합리한 권력이나 체제를 공격하기 위해 날카롭고 노골적인 공격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화해와 포용이든 갈등과 전복이든 해학과 풍자의 골계미가 지닌 주요 특징은 웃음을 도구로 삼는다는 데 있다. 웃음을 유발하는 재담과 우스꽝스러움이 정두섭 시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시집을 통어하는 주된 장치임은 분명하다. 또한 이러한 시적 장치가 비루한 현실을 긍정하며 섣부른 화해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유의미하다. 시인의 사유가 지닌 진중함이 시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기에 그저 골계의 형식을 따라 정두섭 시인의 시를 읽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닌 듯하다. 시집을 여는 시인 「우로보로스」를 보자. 병 속에는 쥐가 있고 병 속에는 뱀이 있고 뱀이 된 쥐는 없고 쥐를 삼킨 뱀만 있고 좁은 병 못 빠져나와 뱀은 쥐를 뱉고 뱉고 구겨진 몸 다리고 구겨질 몸 걸어놓고 옷걸이 물음표만 남기고 사라질 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먼저 온 후회였다 ― 「우로보로스」 전문 시인은 병 속에 갇힌 쥐와 뱀을 응시한다. 시가 차용한 신화 속 존재인 우로보로스는 꼬리를 먹는 뱀의 형상을 띠며 그 원형적 형상으로 인해 완전성을 상징하기도 하며 자신의 꼬리를 먹는 동시에 끝없이 재생하는 꼬리는 무한한 순환의 과정과 윤회의 영원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머리와 꼬리가 맞물려 있기에 시작과 끝, 시작이자 끝을 형상화할 때도 있으며 이는 파괴와 재생의 영속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로보로스가 지닌 영원성은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영속을 내포하고 있다. 우로보로스의 원형은 자기 꼬리를 물어야만 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삶의 굴레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형상화된 “쥐를 삼킨 뱀”이 “좁은 병 못 빠져나와 뱀은 쥐를 뱉고 뱉고” 다시 쥐를 삼킬 수밖에 없는 상황처럼 말이다. 이 구절은 아이러니로 인한 웃음을 유발하는 한편 무한한 고통의 영속을 우리 앞에 현시한다. 죽음과 삶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병 속의 사건은 벗어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고통을 반복하는 우리 삶을 알레고리화한 것으로 읽힌다. 이는 두 번째 수에서 “구겨진 몸”과 “구겨질 몸”이 “물음표만 남기고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시인의 응시와 결합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몸’이 수행하는 일상의 반복은 무한한 삶의 순환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사유할 여유를 주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존재는 “물음표만 남기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충족적인 우로보로스는 정두섭 시인의 시 속에서 구겨지고 구겨질 존재로 스스로를 부정해야만 하는 주체, 그리하여 타자화의 양태로 내몰린 존재로 전치된다.
4.
이명희 시인이 감각하는 세계는 “얼굴 없는 소리들”(「귀에서 소리가 난다」)로 가득하다. ‘얼굴 없음’은 실체의 부재를 의미한다. 실체의 부재는 소리의 실재를 분명하게 감각케 한다. 그러나 그 감각은 ‘나’에게만 한정되며 다른 이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나’의 감각은 소통되지도 공감을 불러오지도 않는다. 소리의 실재에 골몰하는 존재는 그것이 외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명처럼 존재의 내부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쓸쓸함에 휩싸인다. 이 쓸쓸함의 정동은 “방향이 없는 길 위에”(「저물어가는 아버지」) 놓인 고립된 주체의 존재 방식을 가시화한다. 장-뤽 낭시가 말한, 타자와 목적 없는 나눔을 나누고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누는 관계가 불가능한 주체는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리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은 “삶은 언제나 거룩하게, 또는 장렬하게/굴러 떨어”진 것이라 여기며 “속절없는 인사만 가득”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을 “거짓말”이라고 맥락화한다(「생(生)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계(視界)가 스산하기만 하다.
5.
조미희 시인은 “예민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시대의 뒷문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존재를 돌본다(「사라지는 동네」). 이는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문명에서의 오지’의 감각을 내면화한 채 도시 변두리라는 존재의 거소를 살펴본 첫 시집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감각은 “계단 끝까지 오르는 거친 숨결”로 “줄기가 휘어진 모퉁이”에서 “가난”을 경험해본 이의 상실의 체험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정박」,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 그와 같은 도시 빈민의 고단한 삶과 그 누추(陋醜)는 이번 시집으로 이어지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의 곁에서 시인은 “오래 앓다 보면 때론 아픔도 궁금해져 기다리기도” 한다면서 그 아픔의 “더 안쪽 어디쯤에서/집을 짓고 밭을 경작하고 있”는 삶의 양태를 다독인다(「내 이를 물고 간 새는」). 그리고 스스로를 ‘드림캐처’로 자리매김하며 “아무도 너의 꿈이 춤추는 걸 방해하지 않”(「드림캐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곁에 둔다.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어루만지며 존재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비록 유년의 아름다운 순간은 상실했지만, 그때를 기억하며 존재의 현존을 위무하고 미래를 재정립할 수 있도록 소박한 옹호를 수행하는 의지. “하얀 눈길 같은 종이 위에”(「가난한 내가 가난한 시를 쓴다」) 쓰인 시는 시인의 마음과 의지로 충만하기에 ‘가난한 시’에 머물지 않는다. (중략) 조미희 시인의 시가 “가난한 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선량”을 찾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선량”은 선하고 어진 성품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고 옳음을 실천하는 능력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가난을 존재의 실체값으로 만들어 삶을 고단하게 하여도 강제된 욕망에 복무하는 ‘우리’가 아닌 다양한, 지금 이곳의 현존을 포용하는 ‘우리’를 실천코자 하는 시인의 시는 결코 가난할 수가 없다. 마빈 하이퍼만이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두고 “모순을 포용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는 동시에 가까워지고,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했던 것처럼 조미희 시인의 시 역시 세계가 강제하는 모순 속에서 다양한 ‘우리’의 양태를 포용하고 그 거리를 조절하는 한편,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지금 이곳의 ‘우리’를 모색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그 길이 비록 달이 파먹다 남긴 밤처럼 캄캄할지라도 조미희 시인을 따라 여기까지 온 우리는 “가장 보편적인 사회” 너머 “선량”한 개인의 평범한 일상이 구축할 ‘우리’의 희미한 빛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이다.
6.
정일근 시인의 시가 지닌 진정성은 사회적 윤리의 당위론적인 응답을 넘어 자연의 섭리를 삶의 방식으로 일체화함으로써 이를 존재의 연원으로 삼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정일근 시인의 시적 발화는 침묵을 경유한 ‘고래(孤來)’의 반영태라 볼 수 있겠다. 시대와 사회, 이 세계를 온몸으로 앓으며 “오랜 겨울 춥고 적막한 빈손의 시간”(「11월의 사랑―노래하듯이」)을 견디는 고독한 존재의 내면을 톺는 시인은 만추의 계절에 닿아 삶이 내어주는 선물을 우리에게 넌지시 읊는다.
7.
조숙향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펼친다. 첫 시를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시에 이르면 문득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리게 되는데 ‘나비’와 관련된 시편들이 유독 눈에 들어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꿈에 나비가 되어 만족스럽게 날아다니다가 꿈이 깨어 스스로를 나비가 된 장주인지, 장주가 된 나비인지 생각하다 그 구별을 무의미하게 여기곤 ‘차지위물화(此之謂物化)’, 즉 만물이 하나 된 물아일체를 깨닫는 것을 조숙향 시인의 시와 나란히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가 존재의 바깥에서 나비를 바라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호한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분명한 감각으로 외부 세계와 그것이 재현하는 바를 존재의 안쪽으로 끌어오는 조숙향 시인의 독특한 사유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너머로 “내가/먼지인지 구름인지 바람인지/새소리인지”(「접속」) 그 구분이 지닌 불가지성에 관한 성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 혹은 ‘존재의 삶이란 무엇인가’ 등 실존적 질문으로 이어지고 시 속에 재현된 경험과 그것을 둘러싼 원체험의 질료로 전유되어 흥미로운 시적 구조물을 축조한다. 이때의 원체험은 유년 시절에 국한되지 않으며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경험되고 누적된 무의식적 침투로 의미화된다. (중략) 조숙향 시인의 시편들은 나비와 ‘나’의 아날로지가 불러일으키는 감응을 원체험으로 삼아 “허공이 치명적인 공허라는 것을/온몸으로 받아들였을 즈음/한 마리 자나방”(「연결고리」)이 되어 날아오르는 것처럼, 삶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시적 경이를 현시하는 동시에 형이상학적 비전을 모색하며 새로운 시적 사유의 변곡점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저 순결한 감응의 밀도가 우리 삶의 곡절을 얼마나 위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삶의 무의미와 허무 그리고 절망과 고통에 대한 통절한 자각을 거쳐온 것이기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의 실존적 울림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 ― 이병국(시인, 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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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31일 출고 
시인은 빛의 꿈을 꾼다. 빛의 기원을 찾아 새벽에 귀를 열기도 하고 발끝에 불시착한 어느 생애를 머뭇거리기도 한다. ‘시인의 말’에 얼비치는 빛의 색들은 시집의 각 부의 토대가 되어 활자를 매만지며 삶의 기척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한편으로 균열을 은폐한 기만적 세계 속에서 슬픔을 체화한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그려진다. 길들여짐, 혹은 깃들임, 부정과 긍정이 상호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김려원 시인의 시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 그 배면에 침잠해 있는 그늘을 “이슥도록 펼쳐놓는 무릇”(「느티나무 적막」)의 빛으로 길어 올린다. 이 빛을 마주한 우리는 옥타비오 파스가 말한 것처럼 시인과 함께 독자의 자리에서 시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그럼으로써 불꽃은 붉고 푸르고 하얀, 더 나아가 투명한 색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시를 쓰는 층위에서 시를 향유하는 층위로의 자리 옮김이자 그 자체로 또 다른 시적 작업의 수행이 되어 지속적인 성찰을 가능케 한다. 세계를 사는 존재의 사유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기점이 되는 시라는 장소는 그리 간단하게 정리될 수 없겠으나 우리가 감지하는 시인의 시간으로 말미암아 일정한 소격 효과를 만들어내며 치열한 삶의 현장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자기 관조적인 성찰의 언어에 몸을 싣고 은유적 수행이 상상하는 실재의 뒤편에서 은근히 발하는 빛의 꿈과 조우하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성취로 다가온다. 이것은 김려원 시인의 첫 시집 『천년에 아흔아홉 번』을 읽고 난 후 인상을 직조한 이미지이지만 시집에 ‘잠입’하여 읽게 될 시편들을 관성에 기대어 판단하지 않으려는 한 독자의 내밀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대상을 마주하면서 그 대상과 관계 맺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나’와 ‘너’의 이자 관계에 치우쳐 판단하려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취하며 뒷면을 보지 않으려는 회피의 유혹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중략) 시는 그러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 체계를 전복시키며 고통의 향유를 통해 전면적인 반성을 모색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세계를 감각하는 시적 주체 내면의 단단함이다. 시적 주체, 혹은 화자가 경험하는 세계가 아무리 폭력적이고 위압적일지라도 그것과 마주한 주체의 단단함으로 쌓고 연결하는 의미의 구체성이 존재의 취약성으로부터 우리를 다른 자리에 설 수 있게 손 내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려원 시인이 내민 저 손의 단단함이란 시인이 그려낸 시간의 빛깔과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빛의 꿈, 그 한 축에 존재하는 것일 테다.
9.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31일 출고 
이번 시집에서 김신용은 존재의 목 뒷덜미를 향해 떨어지는 물방울의 감각으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표면장력의 긴장으로 경험적 세계의 저 기만적 사실들을 증거하며 우리가 우리의 심연을 어떻게 탐색하고 확장해 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장력(掌力)이 우리 삶의 표면에 어떠한 장력(張力)으로 작용하게 될 수 있는지는 우리가 그것을 수신하는 자세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예측 가능하게 예측 불가능한” 씨의 발아는 거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분명 이 시집은 우리의 목 뒷덜미에 떨어진 물방울의 표면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뒤를 돌아 우리가 외면했던 우리의 절망을 대면케 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씨, 혹은 씨(氏)’가 되도록 이끌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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