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좋아 남쪽으로 이사 왔지만
정작 바다는 못 보고 강을 보며 글을 씁니다.
이 강을 따라가면 남해가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위로하면서요.
달빛이 따스하게 내려앉은 밤,
부드럽고 청량한 바람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좋습니다.
오래도록 다정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기억이 위로가 되는 시간
아주 오래 전, 언젠가의 겨울에 경주에서 머문 적이 있습니다.
늦은 밤 문득 숙소 마당으로 나갔더니 시리고 선명한 달이 기와지붕 위로 떠올라 있는 게 보였습니다. 뽀얀 입김이 흩어지고, 피부는 찬 기운 때문에 움츠러드는데 기와 위에 내려앉은 달빛이 고요하고도 아름다워서 한참이나 머물러 있던 기억이 납니다.
주위는 적막하고, 옅은 바람에 머리카락은 산들거리고, 분명 말을 할 수 없는 달인데도 ‘괜찮아, 아무런 문제도 없어.’라고 속삭여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가끔 그렇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억이 흘러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과 더불어 당시의 시간들이 함께 떠오를 때면 그게 제겐 작은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아, 맞아. 그래도 그때 참 좋았지. 그게 참 행복했어. 그건 또 그립다…….
『폐월화』 전체를 관통하는 달빛 이미지는 그때의 기억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제가 당시에 느꼈던 따뜻한 감정들을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도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서툰 글 솜씨라 잘 표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사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폐월화』가 종이책으로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물론 네이버 베스트리그에 연재되던 기간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더 오래된 글이긴 합니다만.
첫 종이책 인쇄 후엔 긴 시간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이후 웹툰으로도 그려져 『폐월화』는 많은 독자님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판에는 외전 중에서 ‘ 야수전’과 ‘오래된 화첩’만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글이 종이책 출간을 기념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하나씩 추가된 외전들은 전자책 출간, 웹툰 출간을 기념했던 글들인데 이번 개정판에서 함께 담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변화가 있을 때마다 추가한 외전이라고는 하나 어쩌면 그 이야기들은 제가 궁금했던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겸이와 여리가 달이 다섯 개 뜨는 곳으로 가자던 약속을 지켰는지, 작품 내내 욕을 먹었던 이흔에게도 다른 모습이 있진 않았을지, 서래댁과 동아, 무영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마지막 외전 ‘헌화가’는 제목에서 눈치채셨겠지만 향가 헌화가 관련 설화를 차용했습니다. 절벽에 핀 아름다운 꽃과 그것을 꺾어주는 존재라는 설화 속 설정이 어쩌면 폐월화라는 꽃의 시작도 그러하지 않았을까……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겸이와 여리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 두 사람의 인연은 폐월화의 처음과 닿아 있었다.’와 같은 이야기는 외전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많은 우연과 행운과 다행들이 이 글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우연, 많은 독자님들이 글을 읽어준 행운, 좋은 출판사를 만나게 된 다행이 지금의 『폐월화』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을 일들이 좋은 분들께서 마음을 더해주시고 함께해주셔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폐월화』의 시간은 멈추었기에 더 이상의 외전이 더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가끔, 아주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주위를 신비롭게 물들인 달빛을 보게 된다면 겨울의 그 밤과 더불어 한 번씩 폐월화가 떠오를 거 같긴 합니다.
이겸도, 여리도, 서래댁도, 동아도, 무영도, 그리고 이흔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어 내내 행복했을 겁니다. 이 이야기가 저에게도 그랬듯 누군가에겐 그리운 기억이, 따뜻한 위로가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