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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량자(穀梁子)≪곡량전≫의 작자에 대해서는 <예문지>에 ‘≪곡량전≫ 11권, 곡량자(穀梁子), 노나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안사고(顔師古)는 그 이름을 ‘희(喜)’라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전대소(錢大昭)는 ≪한서변의(漢書辨疑)≫에서 민본(閩本) ≪한서≫를 고찰하고 지금 판본에 적힌 이름 ‘희’는 ‘가(嘉)’로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환담(桓譚), 응소(應劭), 채옹(蔡邕), 육덕명(陸德明)은 미신(麋信)의 말을 인용하며 ‘적(赤)’이라고 했다. 왕충(王充)은 ‘치(寘)’,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과 ≪원화성찬(元和姓纂)≫에는 시자(尸子)의 말을 인용해 ‘숙(俶)’이라고 되어 있다. 양사훈(楊士勳)의 ≪곡량전소(穀梁傳疏)≫에는 ‘숙(淑)’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에게 6개의 이름이 있는 것은 ≪곡량전≫을 한 사람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없으며 곡량씨 집안의 학문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게다가 선진(先秦) 시기 문헌 대부분이 개인이 아닌 학파의 집체 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곡량전≫을 특정 개인의 작품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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