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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1909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현동철(玄東轍)과 전주 이씨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현경윤(玄敬允)이고 본관은 연주(延州)다. 제일고보 학적부에는 아버지의 직업은 상인이고, 출신 성분은 양반이며, 본적은 경성부 통의동 38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현덕의 조부 현흥택은 민영익의 수행인 자격으로 1883년 최초의 대미 외교 사절단 보빙사에 참여했고, 1895년에는 시위대 연대장에 임명된 바 있다. 또한 그는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 현덕이 쓴 <자서 소전>에는 출생 당시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았으나, 그의 출생 후 가세가 기울어 사글세를 면하지 못했고, 부모님은 불화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업의 꿈을 포기할 줄 몰랐던 아버지 탓에 살림은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사 횟수가 이십여 회에 달했으며, 가족이 각자도생으로 헤어지길 수삼 회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 가까운 대부도(大阜島)의 친척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현덕은 1923년 인천의 대부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1924년 중퇴하고 중동학교 속성과 1년을 다녔다. 1925년 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해에 중퇴했는데, 학적부에는 전체 수업 일수 245일 가운데 165일을 결석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주소는 경성 관수동 45번지였다.현덕은 192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반적으로 현덕의 등단작은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가작 입선한 <고무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의 등단 지면은 ≪조선일보≫ 신춘문예다. 이 무렵 현덕은 수원 발안 근방의 매립 공사장에서 토공 생활을 했고, 이후 현해탄을 건너가 교토, 오사카 등지를 떠돌며 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흙 바구니를 짊어지지 못하고 쓰러지는 통에 공사장에서 쫓겨났고, 그 일을 계기로 문학의 길에 대한 꿈을 현실화하기에 이르렀다. 1936년 막노동판을 떠돌다가 문학에 뜻을 둔 후 작가 김유정을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현덕은 <자서 소전>의 말미에서 김유정과의 관계를 “지기 고 김유정 형을 얻어 문학을 향한 뜻을 굳게 하고 그 길을 밟던 중, 금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그 길에 자신 같은 것을 가져보며 현재에 이르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했으며, <경칩>(1938), <층>(1938), <두꺼비가 먹은 돈>(1938)을 연이어 발표했다. 1939년 1월 월간 ≪조광≫에 실린 <신진 작가 좌담회>에서 현덕은 등단작 <남생이>가 인천에 있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사고(社告)를 보고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 보기 위해 쓴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로 미루어 당시 현덕의 거주지는 인천이었고, <남생이>의 배경 또한 인천 해안의 빈민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덕은 1939년 인천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동대문 부근의 빈민촌인 경성부 창신정 600의 9번지에 거처를 정했고, 이해에 <골목>(≪조광≫), <잣을 까는 집>(≪여성≫), <녹성좌>(≪조선일보≫)를 발표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수필과 소설에는 변변한 생업마저 없었던 청춘의 불행한 운명과 극도로 위축된 인텔리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방 이후 현덕은 임화와 교제하며 문단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아동문학부, 대중화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아문각), 동화집 ≪포도와 구슬≫(정음사) 등을 간행했다.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의 편집 겸 발행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서울지부 소설부 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소설집 ≪남생이≫(아문각), 동화집 ≪토끼 삼형제≫(을유문화사)를 출판했다. 현덕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했다. 호적부에는 1951년 9월 2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38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1년 북한에서 여러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월북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현덕은 1962년 북한에서 한설야가 숙청될 때 그의 추종 세력들과 함께 숙청되었고,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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