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폴란드 남부의 말로시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뜻에 따라 귀족적인 가톨릭 학교를 거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법학에 흥미가 없던 차에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하고 귀국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틈틈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1933년 첫 작품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평단의 비난과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보나」와 첫 장편 『페르디두르케』를 발표했다. 1939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다음 날 2차 세계 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나치에 의해 긴 판금에 들어갔다. 지방 신문사와 은행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면서 두 번째 장편 『트란스 아틀란틱』을 완성했다. 1933년부터 잡지 《쿨투라》에 관여하면서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1957년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결과 일시적으로 검열이 약화되면서 몇몇 작품들이 출간되었지만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다시 금서로 묶여 1960년대 중반까지 판금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국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장편 『포르노그라피아』를 발표한 후 1963년 포드 재단의 기금을 받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네 번째 장편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코스모스』를 발표하고 1968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69년 프랑스 방스에서 별세했다.
나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먹는 나이가 충만함과 충만하지 않음, 가치 있음과 가치에 미달함 사이에 벌어지는 변증법적 대결에서 수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젊음에 아주 중요하고 흥미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내 소설 세계는 낮은 차원으로 내려간 것이지요. 마치 누군가가 정신의 목덜미를 잡아 가벼움, 즉 열등함 속으로 밀어 넣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철학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니까요. 내 목표는 다만 어떤 주제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위에서 말한 대결에서 특별한 '아름다움들'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