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당쟁의 한복판에 섰던 야심만만한 정치가, 우리 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을 남긴 최고의 시인, 수많은 정적을 제거한 매파의 우두머리, 당대 기라성같은 문인 지식인들과 폭넓게 우의를 다진 최고의 엘리트, 우리네 인간의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풍류인이자 타고난 재인 등,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형상들로 비추어지는 송강 정철. 그의 일생은 타고난 성격이 범상치 않았던 데다 역사 격변기를 살았던 만큼, 파란만장한 삶 바로 그것이었다.
이 평전에서 나는 송강의 삶과 행적을 일대기 형식을 통해 추적하면서, 불같은 개성으로 불꽃같은 생애를 살다 간 ‘격정적 사대부 문인의 초상’을 그리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성장환경, 기질과 품성, 작품경향, 삶에 대한 지향의식 등의 면에서 퍽이나 대조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느 국면에 이르러서는 이런 대조적 측면들이 특유의 개성과 함께 조화롭게 통일된 형상으로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만큼 다채로우면서도 복합적인 형상을 지닌 인물이 바로 송강이다.
우리는 송강에게서 역사 격변기를 헤쳐나간 문인 지식인의 한 전형을 본다. 그는 강렬하게 느끼고 주체적으로 사고했으며 지식인다운 의지와 용기로써 행동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시대가 제기하는 삶과 사회의 문제들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특히 그가 남긴 문학 작품들은 자신이 겪어 나간 삶의 기록이자, 대대로 공감의 지평을 열어 준 사유와 감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또다른 격변의 시대에, 우리가 송강의 삶과 행적과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송강의 삶과 행적을 더듬어 나가면서 나는 송강이라는 인물 특유의 품성과 인간적 풍모는 물론, 위대한 문인으로서의 자취와 작품세계에 담겨진 특질, 또 평생을 두고 추구한 이념과 가치 등을, 그가 생존하며 활동하던 시기 나라 안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두드러진 역사적 동향들과 함께 살피고자 했다. 그리하여 시대 변화와 함께 어렵게만 생각되는 우리 고전문학 유산에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오늘날의 삶과 연관지어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집필했다. 송강의 삶과 행적을 살피면서 나는 행복한 경험을 했다. 쉽게 틀지우기 어려운 그의 인간적인 매력과, 강렬한 개성이 용솟음치는 문학적 감수성의 세계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송강만큼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도 역사상 흔치 않다.
특히, 송강이 겪어온 삶의 기록인 그의 문학작품들은 대부분 인정에 곡진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기쁘고 슬픈 곡절, 간절한 그리움과 애달픈 심사, 호쾌한 낭만과 섬세한 정감 등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는 인간적 계기의 토양이 넓게 깔려 있다. 사람 냄새가 난다. 송강의 삶과 문학이 우리를 매료케 하는 것은, 이처럼 생활현실에서 우러나는 경험적 진실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경험적 진실성의 뿌리와 토양은, 한 마디로 그의 다정다감한 기질과 강인한 집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시공을 초월하여 존경받는 인물이 많은 민족은 행복하다. 인간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기에, 누군들 완벽한 품성을 갖출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사람살이의 개연성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살피고, 그들의 개성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을 거울삼아 내 삶의 의미를 구체화하고자 한다. 인간의 다양한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상상적으로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의 여지를 열어준 삶의 주인공은 참으로 귀하고 값진 존재다. 나아가 그런 지평을 열어준 사람을 우리가 시공을 뛰어 넘어 존경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삶은 대개 민족적 동질성에 기초하게 마련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존경받는 인물을 많이 가진 민족은 그래서 행복하다. 송강은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리 민족은 그래서 더욱 행복하다고 나는 믿는다.
(2003년 4월 15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