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신비주의는 신비가가 신과의 합일을 체험하고, 그 전까지 붙들려 살던 감각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더욱더 성숙하고 발달된 삶을 사는 과정을 말한다. 신비가들은 수행을 통하여 신적 현존을 체험하고 그 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심리학에서는 신비주의를 엑스타시와 같은 현상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신비주의는 인간의 정신발달에서 제일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신적 발달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본다. 그런 생각에서 희랍의 교부들은 신비가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신적으로 되는 신화(deification)를 지향한다고 하였고, 라틴의 교부들은 신비주의의 목표는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표현을 완화시켰는데 그것들은 같은 말이다. 그들은 모두 신비주의에는 신비가들이 신적 존재를 체험하면서 그 전까지 감각적인 세계에 몰두했던 삶에서 벗어나 초감각적 세계의 현존 속에서 살게 되는 특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신비주의는 생명이 진화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이 물질적인 한계에 부딪혀 정체되었던 지점을 뚫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하였다: “신비주의의 궁극적인 결말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영혼에 생명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거대한 약동(躍動)이며 ... 영혼을 더 광대한 모험으로 던지는 거역할 수 없는 충동(poussee)이다”(H.Bergson,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in Oeuvres, Paris : PUF, 1959. 1172).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14세기 독일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인류 문명이 더 높은 단계로 발달하기 전에 정체되어 있는 듯한 막힌 지점을 뚫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상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신비주의는 현대 기독교가 봉착한 많은 문제들, 즉 본질과 존재가 통합되지 못하고, 믿음과 행동이 통합되지 못하여 분열적인 삶을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이나 도구적인 지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삶을 변화시키고 본질에서 나온 참된 인식인 “체험적 깨달음”(gnose)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깊은 관상을 통하여 “체험적 깨달음”을 얻을 때, 이제 더 이상 감각적인 세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 그 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살았던 14세기의 유럽은 근대 세계를 준비하는 격동기였다. 그 당시 유럽 사회에는 십자군 원정이 끝나면서 이슬람 사회에서 발달한 문물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사고가 동시에 유입되었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세속성이 밀려와 교회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려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서 곳곳에서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풍조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 핵심은 교회와 세속사회라는 대극(對極)의 갈등이었다(그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현상은 교황과 황제, 플라톤-어거스틴-둔스 스코투스로 이어지는 전통적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아벨라르-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상의 갈등, 그것이 표상적으로 드러난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회 수도회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도미니크회의 신비가 에크하르트는 그 자신이 갈등의 희생자가 되어 나중에 이단 선고를 받았지만, 이 두 가지 풍조를 통합하여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을 구축하는 한편 그 다음에 오는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플라톤-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의 사상을 종합하여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자연히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창조론과 그리스철학에서 말하는 유출론(流出論)을 종합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시켜 나갔는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꿰뚫고 있는 유출적 창조 사상이다. 그는 신은 피조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였는데, 그때 신의 본질이 피조물들에게 나누어져서 신과 피조물은 서로 다르게 존재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1260년 경 라인 강 연안의 호흐하임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에는 전환기적 현상으로서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고행자들이 진리를 찾으면서 이탈리아, 남부 독일, 보헤미아 지방을 휩쓸고 다녔다. 그 당시 특이한 것은 수도원에 속하지 않았지만 경건한 태도로 자선사업을 하는 베긴이라고 불리는 평신도 공동체와 소위 자유사상가(Free Spirit)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서 에크하르트는 1276년 에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고, 쾰른과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공부를 하다가 1311년부터 1313년까지 빠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나중에 교수가 되어 강의도 하였다. 그 무렵 빠리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단 심판에 회부되는 등 커다란 신학적 논쟁에 휩싸였는데, 그 이유는 아퀴나스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전통적인 신학 사상과 잘 맞지 않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즉 관념론과 경험론을 종합하려고 하였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원천이 되는 이성(raison)을 존중하면서, 이성과 신앙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통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완고한 전통주의자들은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아퀴나스 사상과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모두 정죄하려고 하였고, 그 결과 아퀴나스의 사상을 잇던 에크하르트 역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학문에만 전념하지 않고 교구의 일을 돌보았고, 여러 수도원을 다니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수많은 설교를 하였다. 이런 그의 사상은 성서를 바탕으로 해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사상을 종합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희랍철학자, 아랍철학자, 유태 철학자는 물론 라틴 교부 등의 사상까지 광범위하게 아우르고 있다. 그의 중요한 저작은 본서에 수록된 『영적대화』, 『하느님의 위로』, 『고귀한 사람』, 『초탈』, 『명제집』 및 창세기 주석, 출애굽기 주석, 요한복음 주석, 설교집 등이 있는데, 그는 이 저작들에서 존재와 무, 일치와 다양성, 선과 악, 자비와 죄, 본질과 존재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언제나 일관된 생각은 그것들은 일자(Un)인 하느님 안에서 하나(un)라는 것이었다.
그는 1326년 쾰른의 대주교 하인리히로부터 이단 조사를 받으면서 이단 심판을 준비하다가, 1328년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 죽었는데, 그의 죄목은 그가 신과 인간의 차이를 부정하였고,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였으며, 자선, 기도, 선행과 같은 외적 행동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등 기존의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게 설교하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그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해서 항변하였지만, 교황 요한22세는 1329년 3월27일 그의 주장 가운데서 28개조가 문제될 수 있다고 최종적으로 선고하였다. 그런데 교황의 칙서 가운데서 흥미 있는 것은 그가 에크하르트를 가리켜서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알고자 하여 신앙의 기준과 깊이 있는 숙고에 상응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평생 동안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뛰어넘어서 이성을 통하여 참다운 인식을 추구했던 그의 행적을 가장 잘 말해 주는 말이다.
이 책은 에크하르트의 글 가운데서 그가 본격적인 저작으로 쓴 것들인 『영적대화』, 『하느님의 위로』,『초탈』,『고귀한 사람』과 그 밖에 그가 쓴 글들 가운데서 몇 가지 주제들을 골라서 번역하였고, “초탈”이라는 주제와 관계되는 세 편의 설교를 같이 묶어서 편집하였다. 역자가 이렇게 한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기존의 종교와 교회가 외면 받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참다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에크하르트의 글들이 그런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서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현대인들이 내면에서 찾는 하느님, 특히 내면에서 태어나는 “하느님”(Dieu) 자신인 “하느님의 아들”(Fils de Dieu)을 찾아서 평생 동안 살았고, 그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데, 에크하르트처럼 현대 사회에서 똑같은 갈증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쪼록 그런 사람들이 에크하르트의 글들을 통하여 그 자신의 “하느님”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은 커다란 하나에서는 같지만,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책의 부록에는 에크하르트의 사상적 특징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역자의 논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분석심리학”(『기독교영성의 추구와 분석심리학』, 달을 긷는 우물, 2020) 가운데 일부를 간추려서 “에크하르트의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하였다. 이 책의 제목에는 이 책에 포함된 모든 논문들의 제목을 넣지 못하였고, 대표적인 것 두 가지 『영적대화』, 『하느님의 위로』를 넣어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영적 대화, 하느님의 위로』라고 하였다.
2024. 9. 12.
월정(月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