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피아노 주자로서 작곡가겸 오르간 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 레슨은 아버지에게 받았다. 15세 때 오데사 가극장의 피아노 반주자가 되고, 18세 때 오케스트라의 보조 지휘자를 맡았으며, 다음 해에는 첫 피아노 리사이틀을 가졌다. 22세 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겐리크 구스타포비치 네이가우스의 클래스에 입학하였다.
그의1942년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9번]을 초연하여 프로코피에프와 우정을 맺게 된 것을 계기로 작곡가와 친분을 맺게 되었고 이후 [피아노 소나타 7번], 리히터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9번]을 초연하였다. 그는 전소비에트 음악 콩쿨 우승, 스탈린 상을 받았음에도 1960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리히터는 이후 정기적인 공연과 녹음을 통해 피아노 거장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는데 폭넓은 예술적 교양을 지닌 음악가로서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끊임없이 충실히 가다듬어 자신의 프로그램을 혁신해 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는 국제적 순회연주보다는 알데버크 음악제, 인스부르크 음악주간, 투렌 음악제등 몇몇 특정장소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무한하게 음영(중립성을 가진 피아노로 표현하는)의 팔레트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힘과 순수함, 엄밀함과 자유를 연결하는 효과를 구사했던 리히터는 각 작품에 대해 항상 강렬한 투시력을 갖고 적절한 내적 리듬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