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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해외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최술 (崔述)

국적:아시아 > 중국

출생:1740년

사망:1843년

최근작
2024년 10월 <맹자사실록>

최술(崔述)

자는 무승(武承), 호는 동벽(東壁)이다. 건륭(建隆) 5년(1740) 7월 29일 하북성(河北省) 대명부(大名府) 위현(魏縣)에서 태어나, 1816년 2월 6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고증학에 전념해 34종 88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 중 핵심은 《고신록(考信錄)》인데, 이것은 중국의 선진사(先秦史) 전반을 철저히 고증한 역작으로 총 12종 36권이다. 이들은 전록(前錄)에 《고신록제요(考信錄提要)》 2권, 《보상고고신록(補上古考信錄)》 2권, 정록(正錄)에 《당우고신록(唐虞考信錄)》 4권, 《삼대고신록(三代考信錄)》 12권,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 4권, 후록(後錄)에 《풍호고신별록(?鎬考信別錄)》 3권, 《수사고신여록(洙泗考信餘錄)》 3권, 《맹자사실록(孟子事實錄)》 2권, 《고고속설(考古續說)》 2권, 《고신부록(考信附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대표적인 저작은 공자와 제자들의 행적을 고증한 《수사고신록》·《수사고신여록》과, 맹자의 행적을 고증한 《맹자사실록》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난 최술은 14세에 대명부 동자시(童子試)에서 장원을 했고, 20세 때에는 순천부(順天府) 향시에서 부방(副榜)을 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두 차례 과거에서 낙방하자, 최술은 30세 무렵부터 철저한 고증학을 무기로 위서(僞書)의 견강부회를 바로잡고 이단(異端)의 망언들을 도려낼 ‘고신록’ 제서(諸書)를 집필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고증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열정적으로 저술에 전념해 많은 저작들을 저술해 나갔다.
52세 때에 최술은 자신의 저술을 세상에 전해 줄 애제자 진이화(陳履和, 1761∼1825)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최술의 어릴 적 스승이었던 주영(朱煐)의 제자였던 진이화는 최술의 저작을 열람하고 감동해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가산을 모두 쏟아부어 최술의 저서를 판각하는 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56세에 최술은 복건성(福建省) 나원현(羅源縣)의 지현(知縣)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고, 4년 후에는 상항현(上杭縣)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정사에 바쁜 와중에도 그는 결코 저술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드디어 75세 때인 1815년 최술은 자신의 전집 34종 88권을 완성해 총목록을 정리했다. 그리고 모든 책들을 진이화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고, 이듬해인 1816년 세상을 마쳤다. 최술의 사후에 그의 저서는 부탁한 대로 제자인 진이화에 의해 판각되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술의 저술은 그의 사후 100년 가까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가 1902년 《사학잡지(史學雜誌)》에 〈고신록 해제(考信錄解題)〉를 발표하면서 이 책의 학술적 가치가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1932년 중국의 《사학연보(史學年報)》에 이 글이 번역, 소개되면서 중국 학계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최술의 《고신록》은 당시에 유행하던 이른바 ‘신사학(新史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저술로 량치차오(梁啓超)·후스(胡適)·첸쉬안퉁(錢玄同)·구제강(顧?剛) 등의 극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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