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우리 주위에는 가난하다거나 육체적인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성폭행을 당하고, 마침내는 세상에서 버려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날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사람들과 생활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어서, 누구보다도 이들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고, 나 혼자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더더욱 많지 않다.
이처럼 가난과 폭력 속에서 소외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이 책을 쓰도록 나를 채찍질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눈물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범죄와 좌절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고통에 인간적으로 참례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은 일들도 무가치한 것 만은 아닐 것이라 믿고 이 소설을 세상에 내보낸다.
문학의 오솔길, 땅끝에서 부는 바람
임인년 여름이다. 늦은 꽃샘추위와 된바람 속에서 한옥으로 집을 짓는 매서운 시간들이 지나갔다. 어김없이 올해도 봄꽃은 피고 나뭇잎은 새로 돋아났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는 법은 있어도, 자연이 때를 완전히 어기거나 순환을 멈추는 법은 결코 없다. 공직 생활을 탈출해 서둘러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이 길에서 나이가 들수록 그런 당연한 진리가 더없이 미덥고, 자연에 순응하고 순종하는 일만으로도 삶의 가장 소중한 한 의미가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변함없이 오고 가는 계절 속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운 일들이 나무와 함께 지내는 동안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와 결국은 달성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말없이 피고 지는 자연의 단순한 섭리나마 제대로 배워서 인문학을 실천하기란, 나 같은 부족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세상으로 나온 시간이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불면과 두통에 시달린다.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멀리하고자 했던 귀촌은 다시 인연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간들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더 자주는 내 자신의 지나온 세월과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 사이에서 어떤 불안감이 들곤 한다. 이파리도 없이 꽃을 피우기 위해 몸살을 앓는 개나리처럼, 혹은 순간 짧은 만개 후에 참혹하게 떨어져 내리는 목련처럼, 지금도 내게 알 수 없는 현기증과 신열이 찾아들곤 한다. 집필실 문을 열고 만개한 백일홍을 잠시 바라보다 멀리 해남 땅끝 어란의 푸른 바다를 바라본다.
고향으로의 귀촌은 뜻하지 않은 아버지의 소천이 동기였다. 해남에 내려와 한옥을 지으며 문학에 대해 깊이 숙고했다. 글을 쓰는 문학 활동은 서로 나누고 베푸는 일이라 생각하며, 글을 통해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응원하는 문화 예술의 마당을 열어 주고 싶었다. 인문주의 정신을 회복하겠다는 그 길은 험난한 여정일 것이다.
이곳에 문학촌을 열기로 했다. 힘들게 장만했던 집과 사재를 털어 인문학의 나눔을 실천하고자 했다. 힘든 문학의 길을 걷고 있을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고 싶었다. 나의 오솔길에 문화 예술인들을 초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물한 살에 KBS 방송 작가로 입문하고 작가 교육원 연수원에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 이후 35여 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며 글을 써 왔다. 그 길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이제 땅끝마을에서 바람을 만났다. 문학이란 바람, 그리고 농부와 어부, 마을 사람들과 바람을 맞으며 그동안 집필해 온 여섯 편 중 세 편의 작품들을 엮어, 시나리오 선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필자의 장편소설 『그림자 밟기』를 ‘외로운 외출’이라는 제목으로 시나리오로 각색해 곽재용 감독과 함께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여러 해 걸쳐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작업은 마무리됐다.『그림자 밟기』뿐만 아니라 『인동초』 『엄마의 등대』 등 작품을 시나리오로 묶었다. 『그림자 밟기』는 지우려 해도 삶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장편소설이다.
임철우(소설가)는 『그림자 밟기』 추천의 글에서 “박병두는 맑고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에게서는 고향 들녘의 보리밭 냄새와 흙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그가 자신의 실제 현장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진솔하고도 건강한 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이면을 생생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끈다”고 말했다.
최수철(소설가)은 “한 인간과, 그의 삶과, 그가 쓰는 글이 하나가 되는 경우는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를 낳는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 그 셋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놀랍도록 생생하고 섬세한 숨결을 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안도현(시인)은 “작가 박병두의 『그림자 밟기』는 가장 인간적인 경찰에 바치는 따스한 헌사다. 겉으로 보기에 경찰일 수 없는, 그러나 경찰일 수밖에 없었던 한 사내의 짧았지만 전부였던 시간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희망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사건 현장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동하면서 수첩에 적을 시를 생각하는 주인공 도영, 그에게서 당당한 명예와 인간적 온기를 함께 느끼도록 배려한 작가의 고투에 박수를 보낸다”, 서영채(문학평론가)는 “내가 아는 박병두는 조금은 엉뚱하고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마음은 소녀처럼 여리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기를 꼭 빼닮은 경관을 주인공으로 삼아 장편소설을 펴낸다.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착한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조희문(영화평론가)은 “박병두의 글은 소탈하면서도 생생하다.『그림자 밟기』는 상처로 외로운 자신의 삶을 복원하고 치유해 나가는 이 작가의 치열한 내면 풍경이다”, 곽재용(영화감독)은 “박병두는 항상 자기와 이웃의 삶 속에서 의미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작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누구에게나 용기를 주고 가능성을 던져 준다. 나는 좀 더 많은 박병두들을 만나고 싶다. 이 작가처럼 자기 직업의 한계를 넘어 따뜻한 감성을 가진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찬다면, 우리의 삶도 좀 더 살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라고 말했었다.
모든 작가의 창작 근원은 삶의 주변에서 건져 올리는 기억과 재생, 경험과 상처, 울분과 기쁨이라 생각한다. 이는 인연의 실타래를 어두운 방에서 풀어 나가는 과정이며 흔들리는 삶의 혼란 속에서 글쓰기 작업의 험난한 노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산고 끝에 부족한 글에서 위로받고자 선집으로 묶어 내게 된 것이다.
아버님 소천으로 귀촌한 필자의 시간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때때로 눈물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지금은 구수한 사투리에 빠져 해남 사람이 되어 산다.
그동안 공직 생활과 병행하면서 대학과 연수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잠시 느껴보았던 인간적인 대화를 이곳에서 나누고 있다. 학생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성찰하게 된 낮은 자세의 마음을 다시금 깨달아 가고 있다.
나의 고향 해남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이곳에는 나만의 바람과 들판과 바다가 있다. 나는 송정리 포구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고구마며 감자며 배추가 자라고 있는 푸른 밭과 바다를 바라본다. 문학촌 토문재 뒤로 서 있는 인추산의 겨울도 따사로운 숨결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품 안이다.
해남은 인문학의 산실이다. 고정희 시인은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사로, 김남주 시인은 1994년 10여 년의 감옥살이 후 췌장암으로 작고했다. 김남주 시인은 옥바라지를 자청한 여성과 옥중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고, 고정희 시인은 나의 모교 한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독신으로 살다 해남을 떠났다. 두 시인 모두 민중 해방, 여성 해방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며 시인다운 삶을 살았으며, 시를 투쟁의 무기로 삼아 혁명적 열정을 꽃피웠던 저항 시인들이다. 박성륭, 이동주 시인 모두 이곳 땅끝마을이 낳은 작가들이다.
깊은 밤 토문재를 찾아든 자욱한 안개에 빠져든다. 살며시 밤이슬 내려놓고 사라진 그 애잔한 밤을 맞이한다. 처마 밑 풍경 소리에 잔잔한 가슴이 깨어난다. 고단한 하루가 잦아들면 인추산 도솔암 산길을 걷는다. 험준한 바위 절벽이 우뚝 솟아오른다. 개구리와 다람쥐와 청솔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울창한 숲속에 도솔암이 보인다. 그 웅장한 도솔암의 신비한 기운에 깊이 젖어 들곤 한다.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에 가슴이 스르르 열린다.
그리고 ‘달마산 줄기가 한 굽이 치솟아 오른 사자봉이 보이고 높은 산마루, 토말土末, ‘땅끝’까지 이어진다. 동남쪽 끝에 이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다. 이동주 시인은 해남의 소리를 가슴에 안고 절제 있는 가락을 담았고, 박성룡의 「풀잎」을 풀피리처럼 불고 다니며 순정한 생명의 숨결을 호흡했다. 해남은 고정희와 김남주와 황지우 시인, 김지하 시인의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담은 인문학의 요층지다.
해남은 문학의 성지聖地다. 해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요즘 헬렌켈러 여사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생각이 가장 하찮은 마음을 품은 소인배 때문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라, 당신의 최고를 세상에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좋은 일을 하다 보면 이기적인 다른 동기가 있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부족한 원고를 묶으면서 고향에 부담을 주었다. 시작한 일을 끝맺어야 하는 마음이 무겁다.
인송문학촌 토문재에서 많은 흔적을 두 손 모아 용서를 구한다. 흩어진 시나리오 원고를 휴지 조각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책으로 나왔다. 늘 곁에서 응원해 주는 곽재용 감독, 몸이 불편한데도 항상 나의 편에서 문제를 찾고 해결해 주려는 조희문 영화평론가, 축하의 글을 주신 이정국 감독, 40년간 공연계에 몸을 담은 신시컴퍼니 예술 감독 박명성 대표는 내 고향의 자랑인 문화 예술인이다.
아울러, 명현관 해남군수, 곽준길 부군수, 강상구 전 해남부군수(아동문학가)님을 비롯한 해남의 지인들과 고향으로 귀촌을 도와준 토문재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내조를 아끼지 않은 사랑하는 아내 그루터기, 튼튼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드리고, 인송문학촌 토문재 한옥을 섬세하게, 명인의 장인정신으로 완공해 준 송정 이춘수 명장님과 오재청 대목에게 큰 마음의 빚을 졌다.
출간에 부쳐 고마운 또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아마 하우 시인詩人의 도움이 없었다면 토문재의 바람은 매섭고 더 차가웠을 것이다. 세상을 바르게 보는 혜안과 무수한 장애물들을 이겨 갈 수 있는 정신적인 멘토가 되어 주신 하우下愚 여행 작가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모쪼록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길 바라며, 부족한 원고를 출간해 주신 해남군의 문예진흥기금과 천년의시작 이재무 시인을 비롯한 편집위원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세상과 동떨어진 삶과 “길은 끝났지만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는 루카치의 말처럼 길 찾기 여행을 떠난 어리석고 부족한 이 사람과 토문재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가야 할 날들에 힘과 위로가 되어 줄 토순이, 문돌이, 재돌이에게 이 선집을 내놓는다.
2022년 여름
인송문학촌 토문재仁松文學村 吐文齋에서 박병두
세상의 새장에 갇혀 있는 수많은 풍경들을 만난다. 사람들 사이에 외로움이 흐른다.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내 안에 일어나는 높은 담장을 통감한다. 그 줄기 흐름을 풀기 위해 고단한 시간이 이렇게 스쳐 지나갔다.
아린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힘겨운 시편들 속에서 가난한 사람과 슬픈 사람,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사람,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무겁기도 하고 가벼운 수많은 세상의 짐들을 짊어지고 걸어왔다. 시를 만나고 읽기를 되풀이하면서 내 어설픈 관조의 길이 그동안 길어지지 않았나 싶다.
지난 삶을 뒤돌아볼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쉽게 내려놓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좀 더 세상에 친절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인일보에 연재한 시와 명상, 주말 詩산책, 독자와 함께 읽는 시를 묶어 세상 밖으로 다시 내보낸다.
시는 내게 위로가 되어 주었고, 치안 현장에서의 고단함을 살펴주었다. 행복했다. 고맙다.
어느덧 배구와의 인연도 20년이 흘렀다. 한국배구의 홍일점 감독으로 투혼과 열정을 지닌, 김은선 감독과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류화석 감독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금쯤 깊은 시름과 통증을 앓고 있을 후배에게 이 시산책집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나의 시를 사랑해준 여러 배구 지도자와 선수들, 선수 가족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모쪼록 고마운 마음과 함께 길 찾기 여행이 다시 시작되기를 소원해본다.
끝으로, 부족함이 많은 내 원고를 귀하게 받아주신 경인일보사와 천년의시작 김태석 사장님과 여러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며, 수원의 문.사.모 친구들과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을 비롯해 의젓한 군인으로 입대해 전역을 앞둔, 맑고 착하게 잘 성장해준 조카 황주연에게 더 없이 고맙다.
가야 할 길이 아주 멀다. 뜻이 이끄는 대로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겠다.
아직 못 다한 언어와 소통하면서…
2009년 11월
늦가을 수원 화성행궁에서
박 병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