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평론집은 20세기 후반에 우리의 민족문학이 축적한 창의적인 발상과 유산의 현재성을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계승하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과거의 기념비적 유산이 없이는 분단된 20세기 한국문학을 창조적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문학의 꿈도 요원하다. 다만 ‘모시기’만 해서는 그런 꿈이 실현될 리 없다. 후학일수록 도전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제임스의 방대한 작품세계에서 『한 여인의 초상』을 낳은 중기 국면이 가장 원숙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그러나 『한 여인의 초상』이 지니는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영미 문학사에 모두 이름을 올린 제임스가 갖는 복잡하고 특이한 면모에 걸맞게 총체적으로 발휘되는 언어 예술과 상상력의 산물이 이 작품이라는 데는 중론이 모아진 듯하다.
19세기 후반 부상하는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저벨 아처는 당대 소설의 여주인공들과는 판이한 동선을 그린다. 쇠락하는 제국인 영국을 무대로 자유와 독립이라는 근대 세계체제의 이상을 시험하는 이저벨 아처의 궤적을 면밀하게 따라가다보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더 강렬하고도 미묘한 해방적 여운을 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임스의 방대한 작품세계에서 『한 여인의 초상』을 낳은 중기 국면이 가장 원숙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그러나 『한 여인의 초상』이 지니는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영미 문학사에 모두 이름을 올린 제임스가 갖는 복잡하고 특이한 면모에 걸맞게 총체적으로 발휘되는 언어 예술과 상상력의 산물이 이 작품이라는 데는 중론이 모아진 듯하다.
19세기 후반 부상하는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저벨 아처는 당대 소설의 여주인공들과는 판이한 동선을 그린다. 쇠락하는 제국인 영국을 무대로 자유와 독립이라는 근대 세계체제의 이상을 시험하는 이저벨 아처의 궤적을 면밀하게 따라가다보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더 강렬하고도 미묘한 해방적 여운을 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평론집을 펴낸다. 2007년에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을 냈으니 햇수로는 6년 만이다. 그동안 뜨문뜨문 평문을 써오기는 했지만 평론집의 마무리를 포함한 신고 집필 및 개고 과정은 대부분 미국 유타 주의 쏠트레이크시티에서 이뤄졌다. 유타 대학 당국과 필자가 소속된 학과 동료선생들의 따듯한 보살핌에 힘입어 작년에 가족과 함께 대학 구내 아파트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집중한 결과물이다.
돌이켜보면 첫 평론집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나와는 인연이 없을뿐더러 영문학이나 국문학과도 무관한, 중국의 정치사상을 전공한 어떤 분의 서평 하나가 전부였는데, 과분하고도 뜻밖이어서 나름의 화답을 나중에 같은 지면에 실은 기억이 난다. 아무튼 평단의 반응이 그때 그랬으나 나 자신은 무덤덤했던 것 같다. 시시각각 벌어지는 문화적 현상이나 사건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사회비평 장르의 글쓰기와는 또 다르게, 작품을 읽은 실감을 긴 호흡의 엄밀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문학비평은 오늘의 독자들에게 대중적이기 힘든 면이 있음을 알 만큼은 아는 처지라서 더 그랬다.
물론 문학비평이라는 것도 나 자신, 동료 비평가, 더 나아가 독자와 나누는 대화의 한 방식이라는 개인적인 소신에 비추면 펴낸 평론집에 대한 반응이 그처럼 미미했다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반응도 반응 나름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미미함을 평단이나 독자 탓으로 돌린다는 건 말이 안된다. 대화상대가 없었던 것은 역시 책 자체의 됨됨이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첫 평론집의 머리말에서 ‘민족문학’의 문제의식을 잇고자 했지만 ‘초보적인 수준’임을 자인했는데, 6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초보 딱지를 뗐는지 생각해보면 아득해지기도 한다. 다만 이번 평론집의 1부와 2부에 실린 열두 꼭지의 ‘현장평론’과 3부 세계문학 관련 발언들은 첫 평론집에 비해 양도 늘어났고, 내용에서도 약간은 심화된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어지간히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다뤘지만 우리 문학을 읽는 자세와 관점 면에서 어떤 일관된 주견(主見) 같은 것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겠다.
모두 열일곱 꼭지가 실린 이 평론집은 기존 발표문의 재탕만은 아니다. 18대 대선의 쓰라린 패배를 뒤로하고 2013년 정초에 쓴 서장을 비롯해 신작 원고, 미발표 원고 일곱 꼭지를 포함한 거의 모든 글을 대대적으로 다시 손을 봤다. 물론 부실해서다. 손을 대서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자신하기 어렵지만 그동안 내게 주어진 역량과 시간에 충실하면서 평론작업을 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현재 한국문학의 생산량에 비추면 미미한 작업이고 심화된 내용이나 일관된 흐름도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희망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책의 제목으로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을 내건 대강의 취지는 서장인 「민족문학, 한국문학, 87년체제: 단장(斷章)들」에서 부족하게나마 밝혔다. 하지만 평론집의 체재에 대해서는 좀더 해명할 필요를 느낀다.
이 저서의 내용을 딱 부러지게 반영하는 열쇠말에 해당하는 단어를 두개만 고른다면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아닐까 싶다. 모두 홑따옴표가 붙을 수 있는 개념인데, 특히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아래에서도 약간의 풀이를 하겠다. 아무튼 평론집의 제목을 짓는 데 상당히 고심했다. 포부와 희망을 담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적절히 반영하는 제목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의 분수에도 맞아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고심하기는 했지만 한국문학의 최전선이라는 표현에서 ‘최전선’은 마치 저자가 그런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릴 소지도 없지 않다. 세계문학 역시 가당치 않게 거대한 주제를 내세우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듯하다. 먼저 최전선이 현재 남녘과 대치 중인 북녘까지도 포함한 우리 시대의 현실과 삶에 대해 누구보다 첨예한 고민을 하면서 창작과 평론에 임하는 작가들의 작품 자체를 가리킨다는 점을 적시해두는 게 좋겠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 속에서 태동하기 마련인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을 엄밀하게 파악하면서 나 나름의 관점을 수립하려고 애쓴 바가 다소나마 인정받을 수 있다면, 또한 세계문학의 새로운 구상이랄 만한 것도 없지 않다면 과욕일지언정 허황된 제목이라는 비판만은 듣지 않으리라 믿는다.
1, 2, 3부에 걸쳐 남과 북 공통의 문학유산에 속하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텍스트와 북한작가 및 소위 탈북작가들의 작품을 드문드문 다뤘고 우리 작가들이 상상력의 발동을 남녘과 북녘 모두를 향해 걸어놓은 사례들도 소개하려고 노력했지만, 졸저가 그런 믿음에 얼마나 알찬 내용을 부여했는지는 따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이곳에서 한국어로 무슨 글을 쓰든 독자가 남한의 독자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은 환기해둘 만하다. 남과 북 공히 한국어를 유구한 세월 동안 공용했고 한때는 ‘6?15시대’와 ‘통일시대’를 제법 운운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얼마나 오래 한반도의 나쁜 균형상태가 지속될지 예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열악할수록 평문을 쓰는 마음만은 북녘의 동포 독자들까지도 염두에 두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평론가의 권위가 예전만 못하고 독자마저 없는 마당에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힐난을 들을 수도 있음을 나 자신 모르지 않는다. 또한 힐난을 달게 받아들일 용의도 있다. 그러나 평문의 기본자세만은 그러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당장은 한국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시야는 한반도 전체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로 열어놓는 비평적 훈련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그런 훈련을 역설하는 것이 아직도 걸신들린 것처럼 서구 지식계의 명사들 이름을 주워섬기고 혼잣소리를 일삼는 평단 일각을 향한 나 나름의 항변이기도 함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그런데 한국문학에 홑따옴표가 붙을 수 있는 것은 한반도, 나아가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해외의 다양한 동포 저자 및 독자를 상정한다면 한국문학도 하나의 자명한 실체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근년의 단적인 사례로 각각 영어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옮겨져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제인 정 트렌카(Jane Jeong Trenka, 1972년생)의 『덧없는 환영들』(창비 2013)과 유미리(柳美里, 1968년생)의 『평양에서의 여름방학』(육일오 2012)이 있다. 미국 국적의 ‘입양아’와 일본의 재일조선인이 각기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상처투성이 삶을 담은 두 작품의 대극적이면서도 묘하게 하나의 화음을 이루는 동선, 즉 미국에서 서울을, 일본에서 평양을 오가는 탈경계적 동선은 한국문학의 속문주의(屬文主義)와 속인주의(屬人主義) 모두를 근원적으로 심문하고 있다. 그처럼 다국적?다언어적 배경의 작가와 독자를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는 여전히 ‘민족’이건만 한국문학은 더이상 민족 하나만을 술어로 거느리지 않는다. 그 점은 민족문학운동이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하던 군부독재 시절에도 어느정도는 그러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자들은 목하 자국의 문학에서도 그전과는 사뭇 다른 무게와 질감의 온갖 이질적인 민족적?계급적?성적 존재와 만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한반도에는 분단 이전까지 한반도의 민중이 공유해온 (한문문학이 포함된) ‘민족문학’과 북녘의 조선문학, 남녘의 한국문학, 그리고 대부분 번역으로 읽히는 해외 동포문학 등이 혼재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문학’은 전지구적 현실과 연동된 한반도 특유의 지정학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 이곳의 우리 문학을 상대화하면서 더 넓은 삶의 지평을 향한 작가들의 분투를 촉구하는 용어인 셈이다. 가까운 장래에 연대와 운동을 겸하는 ‘세계문학’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통해 자연스럽게 새롭게 형성됨으로써 ‘하나의 문학’이 이곳 반도에 실현되기를 소망해 마지않는다.
그런 소망과 아울러 ‘창비’라는 사상의 거처에 한층 튼튼히 뿌리내리면서 전진하고 싶다는 바람도 적어두고 싶다. 실제로 평론집을 구성하는 평문 대부분은 2007년 이후에, 좀더 정확히 말하면 2007년 8월부터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에 참여하면서 쓴 것들이다. 1997년에 이 잡지를 통해 등단이라는 것을 한 나로서는 거의 모든 글이 편집위원으로서의 활동과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특별한 감회를 느낀다. 그중 「한국소설의 고투, 마중물로서의 비평」 같은 글은 창비 편집위 내부 싸이트인 에디넷에 참여하지 못했다면 씌어지기 힘들었을 평문이고, 꽤나 긴 「동아시아의 식민지근대와 지역문학의 가능성」 역시 편집진 내부토론에 제출한 발제문에서 촉발된 논문이다. 대학 바깥에 대학 못지않은 공부마당을 따로 마련해준 창비와 어지러운 졸문들을 한권의 번듯한 책으로 묶어준 김성은 형, 이상술 형의 세심한 배려에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한가지 개인사를 부기한다. 2011년 2월 23일에 큰아이를 잃었다. 아이를 잃고 참척(慘慽)이라는 말을 배웠다. 아이의 눈부신 재능과 죽음 앞에서 의연하다 못해 담담하기까지 했던 마지막 모습들을 떠올리면 그 무엇으로도 상실감을 달랠 길이 없다. 아이의 명복을 빌며?태영아 안녕!?어미로서 아픔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홀로 남은 막내를 정성스럽게 챙기고 가정을 다시 추스른 아내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13년 신학기에 유희석 삼가 씀 -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