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계엄』의 한국어판 출간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책이 한국어로 출간되었는데 특히 이 책을 한국 독자들이 읽어주기를 바랐다. 집필을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 독자들로부터 감상을 듣고 싶었다.
1970년대 가혹한 ‘유신’ 체제 하에서 대통령 암살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나와 같은 세대 한국인이라면 우연히 같은 시기 서울에 있던 일본인의 체험기를 어떻게 읽을까? 그 후 한국은 수많은 어려움 끝에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지금은 세계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을 다수 배출한 영화 산업을 일궈냈다.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알고 살아온 한국의 젊은 세대는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나의 궁금증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쓴 사람은 동해 건너편 이웃 나라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와 문화를 가만히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나는 1979년 1년 동안 서울 건국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외국인 교사로 체류했다. 이 책은 그 시기에 내가 보고 들은 수많은 경험에 의지한 부분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렇지만 단순한 회상기가 아니며 논픽션도 아니다. 무대가 된 대학교는 여러 대학교의 인상을 섞은 곳이고 최인호, 하길종 등 몇몇 저명한 예술가와 영화인을 제외하면 등장인물은 모두 허구의 존재다.
세노 아키오라는 순진하지만 약간은 경박한 주인공은 나의 또 다른 장편소설에서도 주인공을 연기한다. 그곳에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에서 광기에 빠져, 파리로 아프리카대륙으로 더 나아가 마다가스카르까지 유랑을 거듭한다. 작가인 나와 이 인물은 거리가 멀고 단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캐릭터다.
『계엄』이 단순한 회상이나 논픽션이 아님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현실의 나와 주인공 세노 아키오의 차이점을 몇 가지 적어두고자 한다.
내가 처음으로 서울 땅을 밟은 것은 (한국 나이로) 스물일곱 살 때였고 이미 도쿄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정치 운동에 참여했고 1970년 일본과 미국의 안전보장조약이 갱신되었을 때 깊은 실망에 빠지는 좌절도 경험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2년 대학에 입학했지만 캠퍼스는 ‘혁명’을 외치는 여러 분파로 분할 점령된 상태로 분파 간에는 살벌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입학한 해에 우리 과 동기생이 살해됐고, 이듬해에는 그 복수로 옆 과 학생이 살해됐다. 도쿄 거리에서는 폭탄이 터졌다. 지식인들은 퇴폐한 신좌익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살인에 철저하게 무력했다. 1970년대 내내 나는 학생운동을 향한 모든 기대를 접고 어둡고 우울한 마음을 품은 채 지냈다.
이 소설은 픽션이고 등장인물은 허구의 존재다. 하지만 모순으로 보일지 몰라도 나는 내가 실제로 만났던 한국인 초상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대학생들은 민족의 역사에 강한 인식이 있었고 지식인으로서 강한 긍지를 가졌다. 동 세대 일본 학생이 한국에 무지했던 것처럼 한국 학생도 일본에 대해 지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소유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어려운 정치 상황 속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민주주의를 향해 강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도쿄 대학의 비열하고 폭력적인 정치 투쟁에 피폐해진 나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이상주의는 신선하면서 두려웠다. 나는 그런 동 세대 사람의 초상을 그려두고 싶었다.
일본에서 만화가 담당한 문화적 정보 제공량은 아마도 다른 어던 나라도 압도할 것입니다. 1956년에 이미 시라토 산페이가 전쟁중의 한국인 강제진용을 주제로 한 <사라져 가는 소녀>를 발표했을 정도니까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80년대까지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해 온 사실을 생각해 보면, 하위문화라고 오랫동안 폄하되어 온 만화쪽이 사실은 민중의 기억을 표상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역사적 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자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책에는 아마도 여러 가지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국인일 수밖에 없는 저자의 시각의 한계가 원인이 될 수도 있겠거니와 80년대라고 하는 집필 시기가 갖는 시대적 제약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번역본을 펴내면서 그런 것들을 굳이 정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글들은 잘못된 판단도 포함되어 모두가 내가 그 당시 실제 피부로 느꼈던 체험이며 살아 있는 사고(思考)였기 때문이다.
*울고 있는 여자
머리카락에 모래를 끼얹으며 열심히 가슴을 쥐어뜯었던 저 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온 몸의 육체적 운동을 통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감상도 멸망의 미학도 아니다. 그것은 강도 높은 퍼포먼스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과 맞딱뜨리게 되었을 때 사람은 새빨갛게 성이 난 종기와도 같은, 세계의 뜨거운 핵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 동일성이 위태로워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예상도 하지 않았던 ‘타자(他者)’를 만자게 되는 것이다. 내게 한국이란 거대한 타자의 집합이다.
*한국 사람이 좋아질 때
‘내가 졌다. 할 수 없다. 오늘은 휴강이다.’ 그 말을 듣자 학생들은 거미 새끼가 흩어지듯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국 사람이 갑자지 좋아질 때는 이런 때이다. 그들의 강한 동료의식. 그리고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대상이 권력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강인함. 그것은 스승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행동과는 모순된 것이지만 실로 표리일체의 행동이다. 서울에서는 아주 사소한 행동을 마음을 훈훈하게 해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만원 버스 안에서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앉아 있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것을 목격했을 때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