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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황석영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3년, 만주 장춘 (염소자리)

직업:소설가

기타:1972년 동국대학교 철학과, 2000년 동 대학원 졸업.

최근작
2024년 10월 <황석영의 어린이 민담집 21 : 호랑이 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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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손님 1

황석영이 말하는 『손님』 내가 방북했을 때 저쪽에서 방문 코스와 스케줄을 협의해왔는데 다른 방북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름대로 선택을 하거든요. 나는 만주에서 태어나 외가인 평양에서 몇년 살다가 삼팔선을 넘었으니까 한번도 본적지에는 가보지 못했어요. 하여튼 황해도 신천(信川)을 방문했는데 매우 암울하고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된 인상을 받았어요. 신천에는 '미제 양민학살 기념관'이 있고 군(郡) 전역에 걸쳐서 학살장소를 보존하고 있어서 더욱 어두웠습니다. 안내원이 격앙된 어조로 전쟁시기의 미군의 만행에 대하여 치를 떨며 설명하고 그 물적 증거물들을 보여주는 식이었지요. 남한에서의 좌우대립에 의한 농촌공동체의 파괴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듣고 보아온 나로서는 분노보다는 죽은이들의 신발이라든가 옷가지, 또는 머리카락 따위 물건들의 생생한 보존과 인형으로 만들어놓은 참상의 실감나는 재현 등에 소름이 끼쳤어요. 더구나 끔찍한 것은 전 군민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3만 5천여명을 학살했다는 것이지요. 몇번의 방문 중에 알게 되었지만 황해도에는 본토박이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이 많았어요. 북한에서 월남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겁니다. 미군은 남한에서도 그랬고 북한지역의 곳곳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 이 지역에서만은 머무를 시간이 없이 곧바로 만주의 국경지대를 향하여 북진했고, 중국군이 참전하자 일제히 후퇴했다고 전사(戰史)에 나와 있어서 이건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베를린에 돌아가자마자 여러가지 자료를 뒤지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해외동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황해도에는 봉건시대부터 토착 대지주가 별로 없었지요. 북에서는 유일한 곡창지대인데 대지주가 별로 없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지요. 조선시대부터 황해도는 토질이 좋은데다 토반세력은 형성되지 않아 일찍부터 궁방전(宮房田)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궁에서 온 하급아전들과 지방 마름〔舍音〕들이 지주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곡산군수로서 목격한 황해도의 백성들이 일년에 여덟 가지, 많게는 열 가지 이상의 부역을 지고 있어, 남도에서 아전의 수탈과 폐해가 가장 심한 전라도보다 더하다고 탄식할 정도였지요. 일제가 들어오면서 궁방전은 곧 국유화되거나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제의 경제기관에 흡수되었어요. 구한말 식민지시대에 이르면 이들 관리인 계층이 중농층을 이루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북선지방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신분상승을 하려면 기껏해야 향시나 보고 실직(實職)이 아닌 직함으로 지방에서 행세깨나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이들은 진충보국(盡忠報國)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개화하여 신지식을 받아들이거나 했습니다.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이들의 배경이 그렇지요. 식민지시대 북선에서 개화 지식인은 두 가지 상반된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의 선진사상인 사회주의를 통한 개화였지요. 사실 이들의 뿌리는 하나였던 셈입니다. 해방이 되어 항일빨치산 세력이 북한정권의 실세가 되었고 겨우 두어달 동안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는데, 남쪽에 미군정이 있는데다 시간도 없었으며 또한 전투경험은 많지만 현장 당활동이나 교육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지방에서 여러가지 무리를 빚게 됩니다. 열정이 넘치는 반면에 교조적인 젊은 당원들은 평양은 물론이고 신의주나, 함흥, 원산 등지에서 기독교로 대표된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저항에 부딪칩니다. 더구나 당의 이론가들은 거의가 소련에서 교육받고 자라나 조선의 실정을 모르는 스딸린주의자들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을 담당할 요원들은 모두가 이른바 기본계급이라고 하는 빈농층이나 머슴 같은 이들이었어요. 이들은 오랫동안 어느 지방 한 동네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인정상이나 도리상 계급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요. 복잡한 공산주의 이론보다는 '적개심'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수단일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이나 중국의 경우, 토지개혁 과정을 착근(着根)이라고 하여 노련한 당일꾼이 하방해서 마을의 농군 집에 기거하며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의식화하여 농민 스스로가 토지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있었겠지요. 물론 이러한 조급성은 북한정권의 책임도 있겠지만 당시의 급박한 국제정세와 분단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조급성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만식이나 그와 비슷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나 지방 향신층으로 이루어진 교계의 장로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이들 상반된 세력은 토지개혁에의 저항, 주일날 대의원선거의 강행과 불참, 그리고 테러와 체포, 처형으로 맞대결하게 되지요.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철천지원수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전쟁 전까지 형성된 지하교회는 일종의 지하조직으로 되었던 겁니다. 백색테러로 유명한 서북청년단이나 한독당 또는 반공청년단의 정신적 근거가 사실은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와 깊게 관련되어 있거든요.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지요.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는다'는 생각입니다. 망명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에 통일운동 활동으로 알게 된 신천 출신 어느 목사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료를 통해 가졌던 의구심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입니다. 북이 이 사건을 '미제'라는 원인제공자에게 돌린 것은 자신들 체제의 봉합과 해소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손님』은 한국전쟁시기 서로 죽고 죽이던 저러한 악몽의 45일을 몽환적으로 드러내는 한판의 해원(解怨)굿입니다. 사실 '손님'은 천연두의 민속적 별명이기도 합니다. 천연두는 17세기에 서양에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를 통하여 중국의 양쯔강 이남을 휩쓸고 동북지방을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뒤부터 조선에 창궐해서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지요. 백성들은 그것이 서병(西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호구별성(胡寇別星)이라고 불렀습니다. 호구는 오랑캐, 별성은 궁 지키는 수문장 같은 무서운 존재이므로 말 그대로 외국 병정을 말합니다. 천연두의 다른 별명인 '마마'라는 말도 당상관 이상의 무섭고 높은 이에게 붙이는 경칭이라는 점에서 천연두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천연두 자료를 찾아보면 각 시대마다 목차가 끝없이 나타나서 어느 자료를 뒤져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마을마다 수호신처럼 서 있는 장승이나 돌 무더기 따위도 무슨 이정표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외방에서 들어올 손님 귀신을 막자는 것이랍니다.

[큰글자도서] 손님 2

황석영이 말하는 『손님』 내가 방북했을 때 저쪽에서 방문 코스와 스케줄을 협의해왔는데 다른 방북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름대로 선택을 하거든요. 나는 만주에서 태어나 외가인 평양에서 몇년 살다가 삼팔선을 넘었으니까 한번도 본적지에는 가보지 못했어요. 하여튼 황해도 신천(信川)을 방문했는데 매우 암울하고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된 인상을 받았어요. 신천에는 '미제 양민학살 기념관'이 있고 군(郡) 전역에 걸쳐서 학살장소를 보존하고 있어서 더욱 어두웠습니다. 안내원이 격앙된 어조로 전쟁시기의 미군의 만행에 대하여 치를 떨며 설명하고 그 물적 증거물들을 보여주는 식이었지요. 남한에서의 좌우대립에 의한 농촌공동체의 파괴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듣고 보아온 나로서는 분노보다는 죽은이들의 신발이라든가 옷가지, 또는 머리카락 따위 물건들의 생생한 보존과 인형으로 만들어놓은 참상의 실감나는 재현 등에 소름이 끼쳤어요. 더구나 끔찍한 것은 전 군민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3만 5천여명을 학살했다는 것이지요. 몇번의 방문 중에 알게 되었지만 황해도에는 본토박이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이 많았어요. 북한에서 월남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겁니다. 미군은 남한에서도 그랬고 북한지역의 곳곳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 이 지역에서만은 머무를 시간이 없이 곧바로 만주의 국경지대를 향하여 북진했고, 중국군이 참전하자 일제히 후퇴했다고 전사(戰史)에 나와 있어서 이건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베를린에 돌아가자마자 여러가지 자료를 뒤지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해외동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황해도에는 봉건시대부터 토착 대지주가 별로 없었지요. 북에서는 유일한 곡창지대인데 대지주가 별로 없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지요. 조선시대부터 황해도는 토질이 좋은데다 토반세력은 형성되지 않아 일찍부터 궁방전(宮房田)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궁에서 온 하급아전들과 지방 마름〔舍音〕들이 지주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곡산군수로서 목격한 황해도의 백성들이 일년에 여덟 가지, 많게는 열 가지 이상의 부역을 지고 있어, 남도에서 아전의 수탈과 폐해가 가장 심한 전라도보다 더하다고 탄식할 정도였지요. 일제가 들어오면서 궁방전은 곧 국유화되거나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제의 경제기관에 흡수되었어요. 구한말 식민지시대에 이르면 이들 관리인 계층이 중농층을 이루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북선지방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신분상승을 하려면 기껏해야 향시나 보고 실직(實職)이 아닌 직함으로 지방에서 행세깨나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이들은 진충보국(盡忠報國)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개화하여 신지식을 받아들이거나 했습니다.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이들의 배경이 그렇지요. 식민지시대 북선에서 개화 지식인은 두 가지 상반된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의 선진사상인 사회주의를 통한 개화였지요. 사실 이들의 뿌리는 하나였던 셈입니다. 해방이 되어 항일빨치산 세력이 북한정권의 실세가 되었고 겨우 두어달 동안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는데, 남쪽에 미군정이 있는데다 시간도 없었으며 또한 전투경험은 많지만 현장 당활동이나 교육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지방에서 여러가지 무리를 빚게 됩니다. 열정이 넘치는 반면에 교조적인 젊은 당원들은 평양은 물론이고 신의주나, 함흥, 원산 등지에서 기독교로 대표된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저항에 부딪칩니다. 더구나 당의 이론가들은 거의가 소련에서 교육받고 자라나 조선의 실정을 모르는 스딸린주의자들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을 담당할 요원들은 모두가 이른바 기본계급이라고 하는 빈농층이나 머슴 같은 이들이었어요. 이들은 오랫동안 어느 지방 한 동네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인정상이나 도리상 계급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요. 복잡한 공산주의 이론보다는 '적개심'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수단일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이나 중국의 경우, 토지개혁 과정을 착근(着根)이라고 하여 노련한 당일꾼이 하방해서 마을의 농군 집에 기거하며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의식화하여 농민 스스로가 토지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있었겠지요. 물론 이러한 조급성은 북한정권의 책임도 있겠지만 당시의 급박한 국제정세와 분단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조급성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만식이나 그와 비슷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나 지방 향신층으로 이루어진 교계의 장로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이들 상반된 세력은 토지개혁에의 저항, 주일날 대의원선거의 강행과 불참, 그리고 테러와 체포, 처형으로 맞대결하게 되지요.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철천지원수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전쟁 전까지 형성된 지하교회는 일종의 지하조직으로 되었던 겁니다. 백색테러로 유명한 서북청년단이나 한독당 또는 반공청년단의 정신적 근거가 사실은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와 깊게 관련되어 있거든요.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지요.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는다'는 생각입니다. 망명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에 통일운동 활동으로 알게 된 신천 출신 어느 목사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료를 통해 가졌던 의구심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입니다. 북이 이 사건을 '미제'라는 원인제공자에게 돌린 것은 자신들 체제의 봉합과 해소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손님』은 한국전쟁시기 서로 죽고 죽이던 저러한 악몽의 45일을 몽환적으로 드러내는 한판의 해원(解怨)굿입니다. 사실 '손님'은 천연두의 민속적 별명이기도 합니다. 천연두는 17세기에 서양에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를 통하여 중국의 양쯔강 이남을 휩쓸고 동북지방을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뒤부터 조선에 창궐해서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지요. 백성들은 그것이 서병(西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호구별성(胡寇別星)이라고 불렀습니다. 호구는 오랑캐, 별성은 궁 지키는 수문장 같은 무서운 존재이므로 말 그대로 외국 병정을 말합니다. 천연두의 다른 별명인 '마마'라는 말도 당상관 이상의 무섭고 높은 이에게 붙이는 경칭이라는 점에서 천연두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천연두 자료를 찾아보면 각 시대마다 목차가 끝없이 나타나서 어느 자료를 뒤져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마을마다 수호신처럼 서 있는 장승이나 돌 무더기 따위도 무슨 이정표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외방에서 들어올 손님 귀신을 막자는 것이랍니다.

개밥바라기별

나는 이 소설에서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썼 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삶에는 실망과 환멸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는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은 네가 다른 어떤 일을 더 잘하게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_「작가의 말」에서

낯익은 세상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지옥 또는 천국처럼 낯선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일상적으로 낯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만들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처럼 "매트릭스"로서의 그 세계는 바로 우리 지척에 있다. 난지도 쓰레기장에 묻어버린 것은 지난 시대의 우리들의 욕망이었지만, 거대한 독극물의 무덤 위에 번성한 풀꽃과 나무들의 푸르름은 그것의 덧없음을 덮어주고 어루만져주고 있는 듯하다. 도깨비가 사라진 것은 전기가 들어오고부터라는 시골 노인들의 말처럼, 지금의 세계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온 도깨비를 끝없이 살해한 과정이었다. 나는 이들 우리 속의 정령을 불러내어 그이들의 마음으로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 있는 거냐?

노티를 꼭 한 점 먹고 싶구나

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지금은 먹을 수 없다거나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때의 맛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람이 변했든지 세월이 변했든지 했을 터이기에. 지금의 내 입맛이 비롯된 그 때 그 맛의 기억들을 곱씹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무기의 그늘 - 상

대충 살펴본 이곳(미국)에서의 베트남에 대한 인식은 역시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휴머니즘, 그러고 나서 반전주의, 아니면 좋은 군인 나쁜 군인 식의 반성적 기록물, 그리고 좀더 심화한다는 게 고작 상처받은 개인의 내면 따위들이다. 전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전쟁에서 미국은 무엇인가, 미국의 사회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가, 아시아와 제3 세계 민중은 어떤 사람들이고 무엇을 생각하나 등등 수많은 근본적인 접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들은 쏘니, 토요따 같은 상품을 통해서 아시아를 바라볼 뿐 아시아 사람을 너무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여튼 위의 경향들 가운데 가장 좋지 않은 것이 소위 내면적 상처를 그린다는 부류인데, 우리의 입장에서는 악덕업자의 일주일 동안의 행악과 일요일날 교회에서의 몇 분 동안의 울음 섞인 간증을 떠올리게 된다. 제국주의적 전쟁을 겪은 우리의 처지에서는 그것만이 돋보여서는 고통당한 아시아 민중의 보편적 삶과 투쟁의 정당성이 보이지 않게 된 다는 점 때문에 나는 반대하는 것이다. (1992년 개정판 서문 중에서)

무기의 그늘 - 하

대충 살펴본 이곳(미국)에서의 베트남에 대한 인식은 역시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휴머니즘, 그러고 나서 반전주의, 아니면 좋은 군인 나쁜 군인 식의 반성적 기록물, 그리고 좀더 심화한다는 게 고작 상처받은 개인의 내면 따위들이다. 전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전쟁에서 미국은 무엇인가, 미국의 사회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가, 아시아와 제3 세계 민중은 어떤 사람들이고 무엇을 생각하나 등등 수많은 근본적인 접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들은 쏘니, 토요따 같은 상품을 통해서 아시아를 바라볼 뿐 아시아 사람을 너무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여튼 위의 경향들 가운데 가장 좋지 않은 것이 소위 내면적 상처를 그린다는 부류인데, 우리의 입장에서는 악덕업자의 일주일 동안의 행악과 일요일날 교회에서의 몇 분 동안의 울음 섞인 간증을 떠올리게 된다. 제국주의적 전쟁을 겪은 우리의 처지에서는 그것만이 돋보여서는 고통당한 아시아 민중의 보편적 삶과 투쟁의 정당성이 보이지 않게 된 다는 점 때문에 나는 반대하는 것이다. (1992년 개정판 서문 중에서)

심청 - 전2권 세트

...나는 <심청>에서 이같은 흐름을 역사적 맥락으로 짚어가기보다는 한 여자의 몸과 마음이 변전하는 과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는 마치 연꽃 한 송이가 봉오리에서 새벽 이슬을 맞고 개화를 시작하고 햇볕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지나는 행인을 만나고 보내기도 하며 밤낮을 거쳐 계절을 보내는 과정과도 같이 썼다 그러므로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 또는 인도와 베트남과 동인도회사, 오키나와의 멸망,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민란, 동학과 청일전쟁, 노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 등의 과정을 멀리서 스쳐지나가는 작은 우레 소리처럼 다루었다. 내가 힘을 기울이고 섭렵했던 자료들 거의가 이 시대 백성들의 일상을 다룬 것들이었고, 매춘과 남녀상열지사야말로 시정 잡배들 삶의 자상한 기록인 셈이다.

심청, 연꽃의 길

...나는 <심청>에서 이같은 흐름을 역사적 맥락으로 짚어가기보다는 한 여자의 몸과 마음이 변전하는 과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는 마치 연꽃 한 송이가 봉오리에서 새벽 이슬을 맞고 개화를 시작하고 햇볕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지나는 행인을 만나고 보내기도 하며 밤낮을 거쳐 계절을 보내는 과정과도 같이 썼다. 그러므로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 또는 인도와 베트남과 동인도회사, 오키나와의 멸망,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민란, 동학과 청일전쟁, 노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 등의 과정을 멀리서 스쳐지나가는 작은 우레 소리처럼 다루었다. 내가 힘을 기울이고 섭렵했던 자료들 거의가 이 시대 백성들의 일상을 다룬 것들이었고, 매춘과 남녀상열지사야말로 시정 잡배들 삶의 자상한 기록인 셈이다. - 초판 서문 중에서 역시 후반부로 가면서 자료에 눌린 감이 없지 않았다. 늘 그에 관해 얘기하면서 오히려 한 권짜리로 압축해볼 수 없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 체류 시절부터 틈틈이 이곳 저곳을 빼고 잘라내면서 다이어트를 해보았지만 기본적인 서사의 틀이 있어서 파격적으로 줄이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이만큼 압축해놓고 보니 좀더 깔끔해 보이기는 한다. 채만식 선생이 <심학규전>을 새로 썼을 때의 시각과 내가 <심청>을 다시 쓴 계기와 시각은 각자 당대의 현실 인식에 근거한 것이리라. 사람 사는 얘기란 예나 지금이나 물량만 커졌을 뿐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이것은 요즈음의 내가 다시 확인하게 되는 세계의 모습이다. - 개정판 서문 중에서

여울물 소리

이야기꾼 이야기를 쓰겠다고 작정하고, 처음에는 19세기쯤에 갖다 놓고 그냥 허황한 민담조의 서사를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우리네 그맘때의 현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올해는 대선까지 있어서 더욱 실감할 수 있지만, 돌이켜보면 ‘근대적 상처’의 잔재가 지금도 우리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이야기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생겨나나,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사라지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만든 이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들이 각자의 당대를 어떻게 살아냈으며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들이 남긴 수백 종의 언패소설과 판소리 대본과 민담, 민요 등등은 눈보라 속을 걷는 나에게 먼저 간 이가 남긴 발자취와도 같았다. 이들과 단절되어 제국주의의 침입과 함께 이식문화로 시작된 한국 근현대문학의 원류를 더듬어 이제 울창한 우리네 서사의 숲에 들어선 느낌이다.

장길산 - 전12권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1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1

역사소설은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 못지않게 그 소설이 언제 씌어졌느냐 하는 당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해두고 싶다. 즉 『장길산』을 두고 ‘남한 진보진영의 초상’이라면 좀 지나친 말이겠지만 1970, 80년대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대 가운데서 ‘민중성’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돌이켜볼 수는 있겠다. 또한 새로운 세기에 미국식 세계화라는 이행기를 맞은 동아시아와 주변부 나라들이 오래전부터 그려오던 민중적 문명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누구는 이 소설이 농민을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둥 또는 반대로 이제 농민 중심의 개혁론은 낡은 게 아니냐는 둥 중구난방이던데, 그야말로 사회과학적 잣대로 인생을 재단하던 지난 시대의 묵은 습관일 것이다. 우선 전체의 흐름을 보고 강물 같은 역사 속에서 현재에도 존재하는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 일이다.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1~4 세트 - 전4권

역사소설은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 못지않게 그 소설이 언제 씌어졌느냐 하는 당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해두고 싶다. 즉 『장길산』을 두고 ‘남한 진보진영의 초상’이라면 좀 지나친 말이겠지만 1970, 80년대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대 가운데서 ‘민중성’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돌이켜볼 수는 있겠다. 또한 새로운 세기에 미국식 세계화라는 이행기를 맞은 동아시아와 주변부 나라들이 오래전부터 그려오던 민중적 문명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누구는 이 소설이 농민을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둥 또는 반대로 이제 농민 중심의 개혁론은 낡은 게 아니냐는 둥 중구난방이던데, 그야말로 사회과학적 잣대로 인생을 재단하던 지난 시대의 묵은 습관일 것이다. 우선 전체의 흐름을 보고 강물 같은 역사 속에서 현재에도 존재하는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 일이다.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10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11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12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2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2

역사소설은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 못지않게 그 소설이 언제 씌어졌느냐 하는 당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해두고 싶다. 즉 『장길산』을 두고 ‘남한 진보진영의 초상’이라면 좀 지나친 말이겠지만 1970, 80년대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대 가운데서 ‘민중성’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돌이켜볼 수는 있겠다. 또한 새로운 세기에 미국식 세계화라는 이행기를 맞은 동아시아와 주변부 나라들이 오래전부터 그려오던 민중적 문명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누구는 이 소설이 농민을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둥 또는 반대로 이제 농민 중심의 개혁론은 낡은 게 아니냐는 둥 중구난방이던데, 그야말로 사회과학적 잣대로 인생을 재단하던 지난 시대의 묵은 습관일 것이다. 우선 전체의 흐름을 보고 강물 같은 역사 속에서 현재에도 존재하는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 일이다.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장길산 3

역사소설은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 못지않게 그 소설이 언제 씌어졌느냐 하는 당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해두고 싶다. 즉 『장길산』을 두고 ‘남한 진보진영의 초상’이라면 좀 지나친 말이겠지만 1970, 80년대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대 가운데서 ‘민중성’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돌이켜볼 수는 있겠다. 또한 새로운 세기에 미국식 세계화라는 이행기를 맞은 동아시아와 주변부 나라들이 오래전부터 그려오던 민중적 문명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누구는 이 소설이 농민을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둥 또는 반대로 이제 농민 중심의 개혁론은 낡은 게 아니냐는 둥 중구난방이던데, 그야말로 사회과학적 잣대로 인생을 재단하던 지난 시대의 묵은 습관일 것이다. 우선 전체의 흐름을 보고 강물 같은 역사 속에서 현재에도 존재하는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 일이다. 『장길산』은 ‘천불천탑’ 전설 속 불상들의 얼굴처럼 우리들 각자가 시대 속에서 그려나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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