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인문학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문송스럽다’는 말이 유행한다는 소식을 하필 졸업식장에서 들었다. “문과여서 죄송스럽다”는 자조 섞인 한탄의 말이다. 그런데 한국 고전문학 선생 노릇을 삼십 년 가까이해온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마땅히 ‘문송겹다’라고나 해야 하나? 인문학적 담론을 형성하는 데 한국문학, 고전문학은 또 얼마나 기여를 할까? 민족문학 담론도 점점 힘을 잃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의문투성이를 숨기지 못하며 다시 한국 고전문학의 초입에 서 있는 젊은이들을 맞이한다.
지금 세상은 고전이니 민족이니 문학이니 떠드는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왜 고전을 알아야 하는가? 왜 민족을 말해야 하는가? 왜 문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근대의 열정과 낭만의 소산이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자기 집단의 내력이나 고전문학은 알고, 말하고, 전해서 끝내 창조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열정과 낭만의 힘을 빌려서라도. 금시발복하는 대박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커다랗게 열리는 세계의 그루터기이자 밑거름임을 믿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댓줄에 감긴 듯한 우리네 삶을 잠시라도 멈추고 스스로의 과거를 상상하게 만들고 ‘오래된 미래’를 꿈꾸게 하는 훌륭한 인문서가 적지 않다. 설령 내가 그러한 저술가가 되기에 역량이 모자랄지언정 그 가능성을 젊은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일마저 지레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민족을 민족으로만 가두지 말고, 고전을 과거의 것으로 버려두지 말고, 문학을 문학 내적 규칙으로 얽매지 말아야 한다. 우리 겨레에게는 말과 짓의 문학이 있었고, 한문학과 우리글 문학이 있었다. 거기다 오늘날에는 방송, 영화, 뮤지컬, 웹툰 등의 다매체 문학이 유행하면서 ‘한류’라는 문화산업을 일으키고 있다. 공연한 열패감에 주눅이 들거나 허망한 기대감에 들뜨기보다는 ‘문송겨운’ 궁함을 변과 통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궁즉변(窮則變)이요, 변즉통(變則通)이다. 동아시아의 전통 지식인들이 궁함을 고집스럽게 지켜냈던 고궁론(固窮論)의 전통이 새삼스럽다.
이 책의 초고를 2001년에 완성해서 국문학과의 고전문학 입문서로 사용해 왔다. 해마다 원고를 조금씩 깁고 다듬어 왔지만, 이제는 캠퍼스 통폐합이니, 구조조정이니, 기초학문 통합의 ‘리버럴아트 칼리지’이니 변화의 바람이 거세진다. 그래도 우리 옛 문학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니 오히려 우리 옛문학의 넘터와 삶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를 느꼈다. 나 자신은 이를 통해서 인문학적 소통의 장으로 삼고자 하는 열의를 가다듬는다. 교수와 학습의 방식이 예전과 크게 달려졌다 하더라도 시대적 조류가 바뀌었다는 점을 어떻게 수용하고 문명 변화의 거센 물결을 어떻게 타고 넘을 것이냐를 문제의 관건으로 삼는다.
변화의 이면에는 이전에 좀체로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파도가 섞여 있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의 서먹한 분위기와 부족한 시간을 인터넷을 활용하여 극복하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여준다. 모든 교과목에 제공되는 이러닝(e-learning)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하며 일방적 지식 전달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상호 소통을 시도한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를 이겨낼 지혜의 일단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
이 책 ??한국 고전문학의 넘터??는 모두 열세 고개로 이루어져 있다. 구비문학이 네 고개, 국문문학이 연행문학 텍스트를 포함하여 여섯 고개, 한문문학이 세 고개이다. 한국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우리 옛문학을 ‘넘터’와 ‘고개’라고 말한 뜻은 이 책 마지막에서 밝혔다. 원래는 조금 많은 고개를 두어 스무고개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한 학기에 맞추어 그처럼 한정했다. 문학지리학, 구비·국문·한문문학의 역동성, 고전과 현대의 관련성, 동아시아 비교문학 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고전문학의 삶터’라는 자매판을 꾸며보고도 싶다. 그러나 우선 ‘넘터’에서 지레 겁먹고 산고개를 회피하지 않도록 초심자를 최대한 배려한다는 마음으로 원문을 모두 현대어로 바꾸어 제시하고 필요한 곳마다 상세한 주석을 첨가했다. 아울러 그것들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길을 나름 다양하게 안내하고자 했다. 물론 맨 뒤에 배치한 한문학에서는 원문을 함께 두어 그것에다 각주를 달아 참고하게 했다. 이 무슨 모진 깔딱고개냐 하겠지만 이제까지 넘어왔던 다리 힘을 믿고 탄력을 받으면 한문 속에서 우리 문학의 향기를 맛보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해마다 손질해왔던 원고의 제록스본을 접했던 졸업생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이 원고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던 김민준은 몇 해 전에 출판사 직장을 구하고 있는 도중에 난해한 부분과 미심쩍은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하고 의견을 제시해 주었다. 한편 어떤 해에는 각 고개에 댓글을 달아준 수강자들이 모두 12명이나 되었다. 한 학기 동안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도 많지만, 열의를 보인 학생들이 제법 있어서 댓글이 풍성해졌다. 댓글에 대해 나는 강의자로서 댓글을 달았고, 다른 학생들이 또 다른 댓글로써 상호 피드백의 소통 분위기를 돋웠다. 참여한 학생들은 정리 과정에서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특히 이승제, 강효진, 정만호는 ‘넘터 편집부’를 자처하며 댓글들을 모아서 참여 학생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나에게 넘겨주었다. 지나고 보니 고개를 넘기 위한 건강한 쉼터가 마련됐음을 뿌듯하게 여긴다. ‘쉼터’의 이야기판을 꽃피운 이들의 이름과 필명을 밝혀서 정겨운 마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이승제-제로/ 막산이/ 허슬러/ 정어리목소리/고전오타쿠; 정만호-녹차라떼/ 케세라세라; 안서현-현; 지동환-세류아; 강효진-SKYHOSTAR/ 울룰루/ 미미르; 이지은-J; 김서경-서울동경/ 서쪽에서뜨는해; 이다건-보고싶다건네다; 김다희-별솔하람; 윤이화-또치; 안다영-가리C; 김혜민-해가뜨면민들레씨앗. 여기에 올해 댓글 약간을 추려 보탰다. 수민-엄수민, 기막준-김학준, 혜란쌤-이혜란.
2019년 8월 말복을 앞두고
말죽거리 무벌당(无伐堂)에서 윤주필 씀 - 머리말
그동안 우언에 관한 연구에 천착해 왔다. 논문도 많이 쌓이고 저서나 편저도 제법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왜 또 쓰는가? 책 제목으로 보자면 한국 문학사에 우언문학을 얹은 모양새인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기 위해 ‘한국 우언문학사 연구의 관점’을 서장에서 여러 절에 걸쳐 밝혔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저자의 변을 좀더 진솔하게 말하면서 저술 의도가 무엇이었나 새삼 되돌아 본다.
우언이 문학이라면 작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품을 꼼꼼히 따지면서 우언문학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설총의 <화왕계>를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왔다. 또 김춘추를 살려낸 <귀토지설>도 그 비슷한 유형으로 이해한다. 조금 더 확대하면 임춘과 이규보가 똑같이 술이라는 소재와 가전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판이한 내용을 창작했던 <국순전>과 <국선생전>도 전범이 될 만하다. 그렇지만 이들을 분석하다 보면 그 속뜻이 한 겹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의 계기는 작품의 주변 혹은 이면에서 주어진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게 우언 아닌가! 문학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겠지만 우언은 유독 그러한 우회적 통로를 애써 매설해 놓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우언문학은 작가에 관해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알아야 그가 남긴 글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일반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시대 속에 놓인 상황을 알지 못하면 우언 작품의 에둘러 말하는 우회 통로는 묻혀 버리고 말장난 같은 이상한 헛소리만 남는다. <귀토지설>과 <화왕계>의 문면을 추출해 놓는다고 순수한 작품이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미의 소통을 죽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귀토지설>은 민담에 가까운 우화처럼 보이고, <화왕계>와는 어디에 소속되기 어려운 기타의 문학 양식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들은 굳이 우화와 우언을 별개의 문학 양식이나 갈래처럼 이해한다. 이 작품들의 진정한 의미는 그 문면이 놓여 있는 작가론적 맥락 속에 살아 있다. ??삼국사기??의 <김유신열전>과 <설총전>이 중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그러한 문맥이 바로 찾아지지 않아 말장난 이상의 속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설사 우언이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작가와 독자만을 전제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귀토지설>과 <화왕계>, <국순전>과 <국선생전>의 차이는 바로 입말과 글말의 소통 방식이 판이하다는 점 때문에 생겨났다. 전자는 담론 상황의 한 요소로 우언 작품이 삽입되는 데 비해서, 후자는 글 창작의 개체성이 작품의 양식이나 특징을 유별나게 만든다. 이처럼 우언은 구비문학으로 소급될 뿐만 아니라 인공적 문학 양식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데 관여한다.
우언은 인간의 상상체계 전반에 관여한다. 인간은 만물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지만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실재와 인식 사이에는 상상체계가 작용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상상의 분비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상상이 제거된 현실이라면 그것은 사람이 끼어들지 못하는 원시자연의 세계이다. 그런데 우언은 그 상상체계의 층위와 인식의 질을 문제 삼는다.
예컨대 신화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고대 말기에 모든 문명권에서 일제히 우언이 발생했다. 상상과 현실의 문턱이 낮았던 고대 문명에서 우언은 그 상상체계의 환상성을 가상으로 대체하면서 고대 문명의 현실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따라서 고대 말기의 우언은 종종 고대 신화를 적절한 소재로 선택하면서 의미를 변형시켰다. 그러한 우언 덕분에 신화의 환상성은 부정되고 신화는 현실의 이면을 탐구하기 위한 가상의 자료로 재활용됐다. 다시 말하면 고대 신화는 중세의 우화로 재해석됐다.
한편 가상의 상상체계는 현실을 위계질서 안에서 재구성하는 중세 문명권에서 번성했다. 중심과 주변, 보편과 특수, 평등과 차별, 전범과 창안 등의 대립항이 공존하면서 세계관, 가치관, 계층, 글쓰기 등의 다양한 방식을 구성해 나갔다. 중세 우언은 그러한 이원론적 공존의 실상과 이면을 가상 체계를 통해 구성해 나갔다. 문명권의 공동문어 문학인 한문학, 민족어 문학인 국문문학과 구비문학이 상호 경쟁하면서 보완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 그 공존의 산물이다. 그러나 위계질서의 하위에 놓이는 주변, 특수, 차별, 창안 등이 상위의 요소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문명 단계가 되자 한문학 자체에 변화뿐만 아니라 국문 문학의 우언이 발생했다. 한문학에서 역사문학과 소설이 등장했고, 한문학의 사부(辭賦) 양식에 못지않게 국문문학의 교술시가 양식에서 우언 글쓰기가 중요해졌다. 중세 전기에서 중세 후기로의 전환이다.
그러나 가상의 상상체계는 중세적 위계질서의 모순이 심화되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신분제가 흔들리고 경제력에 기반한 계급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중세적 통치술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해체기적 상황에서 우언은 기껏 모순을 폭로하는 세태 묘사나 풍자에 만족하지 않고 대안 모색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근대로의 이행기에서 추구한 이상의 상상체계라고 일컬을 만하다. 중세에서는 의(義)와 이(利)의 대립상을 원리와 실제의 수직적 관계로 공존시켰다면, 이 시기에는 이용(利用), 후생(厚生), 광덕(廣德)의 지향을 통해서 현실과 이상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언은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수께끼, 점괘, 풍수지리, 불교, 도교, 도상(圖像), 판놀이(board game), 심성도설(心性圖說) 등의 영역은 물론이고 석가산(石假山) 같은 인공 정원, 와유(臥遊)나 가어옹(假漁翁)의 산수 애호 등의 문화 현상도 우언적 사유에 기반하고 있다. 더구나 계급사회에 기반한 근대 이후는 더 이상 상상체계에 기대어 현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물신화하는 현실에서 ‘돈’은 그것들의 가치를 매개할 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조정함으로써 물신의 우두머리, 즉 빅브라더가 된다. 근대적 유토피아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돈이야말로 디스토피아의 핵심이라고 할 때 우언적 사유가 여기에도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자 우언은 퇴장하고 알레고리가 등장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우언은 작품론과 작가론을 넘어서 문명사의 단계에 입각하여 문학사로 기술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한문학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온통 본과 보기의 관계를 전제로 한 글쓰기이다. 독해를 할 때 자구마다 전고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낭패하기 일쑤이다. 글자만 가지고 씨름하면 옆길로 미끄러진다. 흔히들 ‘요순시절’, ‘요순지치’를 말하지만 진짜 요임금 순임금의 시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누가 요순 임금을 겪어보았겠는가. 단지 요순이라는 전범에 빗대어서 특정한 시대의 정치를 사례로 들어 평가하는 언어 구사이다. 그러한 한문학의 특징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문학사 기술이 요긴하고, 우언은 한문학 이전과 이후까지 이어지는 사유 방식이므로 더욱 문학사의 종합적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했다.
이제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겠다. 우선 이 저서에서 인용한 수많은 논저가 있다. 책 장절 아래의 각 항에 연구물의 출처와 저자를 밝혀 적었고, 도움 받은 부분을 간략히 부기했다. 일일이 인사드리지 못하지만 논지 전개에 길잡이가 됐음에 감사드린다. 그 가운데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는 본 저서의 가장 큰 길잡이였음을 밝히며 감사드린다. 설파(雪坡) 조동일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고, 또 ??한국문학통사?? 제1판~4판(지식산업사, 1982~2005)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가깝게 읽고 강단의 교재로 사용했다. 또 단국대 대학원 <문학사비평연구> 강의에서 조동일, ??문학사는 어디로??(지식산업사, 2015)와 함께 이 저서의 완성 원고를 교재로 삼아 번갈아 읽고, 석박사반 수강생 이혜란, 유진희, 김도언이 제시한 교정 사항과 의견을 나름대로 수용했다. 차제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 저서는 2014년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다. 3년간 정액 지원을 받으면서 좋은 여건하에 초고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 한국문화사에서 출판하는 내력도 특이하여 즐거운 추억을 여기에 밝힌다. 출판사의 조정흠 차장은 동 재단의 저술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 차례 학교 연구실로 방문하여 원고를 맡겨달라고 청했다. 채 완성하지도 못한 상황인지라 확답을 주지 못했는데도 기회가 될 때마다 방문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출판 계약서를 쓰고 나니 조 차장은 “영업하는 맛이 이런 거지요!”라며 웃었다. 이후 편집부의 유인경 님은 꼼꼼하게 교정과 윤문 과정을 담당해 주었다. 색인 작성도 권하여서 따랐다. 김솔희 님은 몇 차례 표지디자인를 제작하면서 저자의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 모두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이 책은 한국우언문학사의 첫 권이다. 고대에서 중세후기(조선 전기)까지 다루었다. 애초에는 통사를 기획했지만 중간 결과물로 내놓는다. 이만해도 책 한 권 분량이 훌쩍 넘으니 우선 세상에 선을 보여 스스로 다잡는 계기로 삼는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해당되는 조선후기, 1919년 이전까지의 애국계몽기와 일제 초기의 얼개를 세우고 자료를 배치해 보았지만 집필을 완성하기까지 또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하기 어렵다. 대학 정년을 세 해 앞두고 힘닿는 대로 노력할 것을 기약할 뿐이다.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대방가의 관심과 질정을 바라 마지 않는다.
2019년 2월 7일 기해년 설명절 연휴를 마치고 - 저자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