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부터 나에게는 나무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친구는 다른 가로수보다 줄기는 가늘고 키가 작았던 은행나무.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릴 때마다 그 나무 옆에 서서 마음으로 이야기를 건넸어요. 보통 시시한 이야기였지만 때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털어놓기도했습니다. 집에서 식물 영양제를 가지고 나와 밑동에 꽂아주기도 했습니다. 그 나무는 잘 있을까요. 사람이 뽑거나 베어내지 않았다면 아마 키가 많이 자랐겠지요.
나무 친구는 학교에도 있었습니다. 교실 창과 복도 창에서 각각 볼 수 있었던 나무들. 꽤 멀리 있는 그들에게도 매일 마음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끼리 부딪치는 모양은 마치 손뼉을 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때 그들에게 건넨 말이란 대개 슬프거나 속상한 내용이었고, 그들은 나를 향해 힘껏 박수를 보냈습니다.
어른이 된 다음에도 자주 오가는 산책길이나 버스정류장, 주기적으로 들르는 장소마다 나무 친구를 두었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나무는 늘 있었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는 늘 거기 있으니까요. 내 얘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가끔은 물었습니다. 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어? 여기서 자주 만나는 사람이 있어? 어떤 풍경을 가장 좋아해? 물론 나무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나무의 나이가 궁금해서 줄기나 수관을 유심히 살펴본 적도 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제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매일 저녁 산책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날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산책길에 팽나무(제주에서는 ‘폭낭’ 또는 ‘퐁낭’이라고 부릅니다) 군락지가 있었습니다. 나무 근처에는 사람이 만든 안내판이 있었고, 나무들의 수령이 적혀 있었습니다. 수령은 대개 300년이 넘었습니다. 300년 동안 나무는 그곳에서…… 다 봤을 겁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악행을, 나약함을, 순수함을, 서로를 돕고 아끼는 모습을, 사랑하고 기도하다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리는 찰나의 삶을.
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주와 서울, 대전과 천안의 나무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요.
나무를 알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과 인터넷 정보를 찾아 봤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무를 모릅니다. 나무를 보면서도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생각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어둡고 축축해져서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계속해서 땅을 파는 기분이었습니다. 줄기처럼, 잎처럼, 햇살을 받으며 하늘 높이 오르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나 뿌리처럼 더욱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매일 글을 썼습니다.
10여 년간 붙들고 지낸 여러 질문이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쓴 문장과 단어가 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질문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내가 계속 묻던 것은 알고 싶지 않은 것이었어요. 모른 채 살고 싶은 것. 답을 알게 될까 두렵습니다. 풀지 못한 문제로 남겨두고 다른 질문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다른 질문. 그것이 가능할까요. 가까스로 사람에 불과한 내가. 글을 쓸수록 강렬하게 인지합니다. 한 번뿐인 삶, 다시없을 오늘을.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어요. 파란 하늘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 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 그리고 이 문장을 바라보는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해요. 지금 내 마음에는 광활한 하늘과 드넓은 바다, 거센 바람을 타는 새, 비바람에도 한자리에서 다만 흔들리는 나무가 있습니다. 단 한 사람, 당신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지키며 언제고 당도할 안부를 기다리겠습니다.
초판 발행 날짜는 2013년 12월 24일. 무척 추운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원도처럼 혼자였고 간절하게 기억을 헤집으며 갈등했다. 나는 왜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고 말해도 되는가,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가 질문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따라가며 소설을 쓴다. 계속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초고를 쓸 때 파일명은 ‘원도’였다. 출간하면서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당시 출판사가 그 제목을 원했다.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으나 반대하고 싶었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문장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공포였으니까. 책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끊임없이 질문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원도’를 원하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전문가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출간 후 책장 구석진 곳에 책을 꽂아두고 다시 펼쳐보지 않았다. 내 안에 들끓던 무서운 질문을 소설로 써서 전부 버렸다고 믿었다. 내겐 다른 이야기가 필요했다. 겨울은 끝나고, 또 다른 겨울이 도래하고, 쉼 없이 글을 쓰던 2018년 어느 날, 절판을 요청하는 메일을 출판사에 보냈다. 출판사 내부 사정과 개인적인 이유가 맞물렸다. 그렇게 이 소설은 초판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다.
몇 년 전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의 그 책이 온라인 서점의 중고책 시장에서 정가의 서너 배 넘는 가격으로 판매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겨울밤 어둠 속에서 홀로 스러져가는 원도처럼 고요하게 잊힐 줄 알았는데…… 대체…… 왜……? 극소수일지라도 원도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문득 무서워졌다. 써서 버렸다는 믿음은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질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개정판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십여 년 전에 쓴 나의 글을 다시 읽는 데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나조차 외면하고 있는 ‘원도’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에게. 책장 구석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책 속에는 십여 년 전 책갈피 삼아 만들었던 빳빳한 종이가 있었다. 그것에 다음의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바로 나의 관심의 전부다.
- 《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책세상)
소설을 쓰던 당시 골몰한 주제일 텐데, 그 또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 속 문장처럼 ‘느닷없이 벽을 뚫고 튀어나오는 주먹’ 같은 ‘그 안에 꽃잎이 있을지 잘린 혀가 있을지 터진 눈알이 있을지 다이아몬드가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기억들. 그래서 나는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때 내 대답은 기억에 없다. 지금 내 대답은 ‘그럴 수 없다’.
제목에 관하여, 십여 년 전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나는 본래 제목을 유지하길 원했고 출판사에서는 ‘원도’라는 제목을 원했다. 초판과 개정판이 별 차이 없으므로 원제를 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원제를 바꾸는 행위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선택했을 극소수의 초판 독자에게 서운함을 주지 않을까 우려도 됐다.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이 꽤 파격적이며 심지어 멋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질문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이다. 두렵지만 피하고 싶진 않을 만큼. 하지만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를 원하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십여 년 전의 파일명을 되찾았다.
어쨌든 나에겐 사랑이 필요하다는 호소. 그것을 전하려고 계속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가’라는 문장은 ‘이렇게 계속 사랑해도 되는가’라는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핍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넘쳐흘렀다.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흐르는 그것을 잠시라도 막아서 내 안에 가두어보자는 안간힘이었는지도. 이 소설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그때 원도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다음 질문으로 건너갈 수 있었음을.
(…) 초판을 읽어주신 분들, 중고책을 찾아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도 저는 소통의 불가능과 타인의 몰이해를 생각합니다. 더는 믿지 않고 그저 생각합니다. 질문을 따라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그 길 위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길.
글을 쓰는 동안 오직 소설 속 인물만을 생각하는 시간이 소중했다. 그런 시간을 보낸 뒤에는 나란 인간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이번에도 달라지고 싶었다. 좁은 방을 맴도는 걸 멈추고 다시 의자에 앉으며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조금만 더 친해지자고.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해달라고.
두 번째 소설집을 묶으며 생각했다. 나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살짝 틀어 버린 것 같다고. 홀로 존재하는 나와 당신을 보면서, 이제는 우리의 연한 부분을 믿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연해서 상처받기 쉽지만, 연하기에 서로를 더 끌어안을 수 있는, 우리가 드러내지 않는 어떤 마음을. (……)
나는 여전히 희망을 모르지만 사람을 믿지 않을 수는 없다. 단념 다음에 오는 긴 여백을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끝과 시작 사이에 있다.
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하고, 분명 살아 있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
2015년 3월, 일인용 의자에 앉아
엄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언제나 ‘행복하다’는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
동하의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두려웠다. 섣불리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걱정과 불안만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 감각의 끝은 끈질기게 그 세계만 가리켰다. 지금, 여기, 이곳만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으나 자꾸 눈이 감겼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데, 고인 물에서나 풍기는 썩은 내가 났다. 그 냄새에 익숙해지긴 싫은데, 그것 아닌 냄새는 기억할 수 없었다. 글을 쓸 때면 내 손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나를 형성하는 감각이 죄다 이 모양인데,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 살, 열다섯 살, 스물세 살, 서른여섯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 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 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공간, 다양한 우주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떤 세계에서 내가 슬퍼할 때 다른 세계에서 나는 기쁘다. 저 세계에서 내가 삶의 경이로움에 빠져 있을 때 그 세계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삶을 저주한다. 무수한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없고 유일한 나는 찰나의 찰나. 우주는 아주 넓고 깊고 신비로우므로 내가 유일하든 무수하든 상관없을 테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허무를 잊지 않으면 낙관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
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담대해진다. 괴팍한 불안이 혼자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고 소설을 쓸 수 있다. 쓰다 보면 견딜 수 있다. (……)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똑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일의 나 또한 여전히 쓰는 사람이길 희망하며.
열일곱 살부터 나에게는 나무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친구는 다른 가로수보다 줄기는 가늘고 키가 작았던 은행나무.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릴 때마다 그 나무 옆에 서서 마음으로 이야기를 건넸어요. 보통 시시한 이야기였지만 때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털어놓기도했습니다. 집에서 식물 영양제를 가지고 나와 밑동에 꽂아주기도 했습니다. 그 나무는 잘 있을까요. 사람이 뽑거나 베어내지 않았다면 아마 키가 많이 자랐겠지요.
나무 친구는 학교에도 있었습니다. 교실 창과 복도 창에서 각각 볼 수 있었던 나무들. 꽤 멀리 있는 그들에게도 매일 마음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끼리 부딪치는 모양은 마치 손뼉을 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때 그들에게 건넨 말이란 대개 슬프거나 속상한 내용이었고, 그들은 나를 향해 힘껏 박수를 보냈습니다.
어른이 된 다음에도 자주 오가는 산책길이나 버스정류장, 주기적으로 들르는 장소마다 나무 친구를 두었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나무는 늘 있었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는 늘 거기 있으니까요. 내 얘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가끔은 물었습니다. 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어? 여기서 자주 만나는 사람이 있어? 어떤 풍경을 가장 좋아해? 물론 나무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나무의 나이가 궁금해서 줄기나 수관을 유심히 살펴본 적도 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제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매일 저녁 산책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날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산책길에 팽나무(제주에서는 ‘폭낭’ 또는 ‘퐁낭’이라고 부릅니다) 군락지가 있었습니다. 나무 근처에는 사람이 만든 안내판이 있었고, 나무들의 수령이 적혀 있었습니다. 수령은 대개 300년이 넘었습니다. 300년 동안 나무는 그곳에서…… 다 봤을 겁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악행을, 나약함을, 순수함을, 서로를 돕고 아끼는 모습을, 사랑하고 기도하다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리는 찰나의 삶을.
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주와 서울, 대전과 천안의 나무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요.
나무를 알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과 인터넷 정보를 찾아 봤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무를 모릅니다. 나무를 보면서도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생각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어둡고 축축해져서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계속해서 땅을 파는 기분이었습니다. 줄기처럼, 잎처럼, 햇살을 받으며 하늘 높이 오르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나 뿌리처럼 더욱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매일 글을 썼습니다.
10여 년간 붙들고 지낸 여러 질문이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쓴 문장과 단어가 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질문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내가 계속 묻던 것은 알고 싶지 않은 것이었어요. 모른 채 살고 싶은 것. 답을 알게 될까 두렵습니다. 풀지 못한 문제로 남겨두고 다른 질문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다른 질문. 그것이 가능할까요. 가까스로 사람에 불과한 내가. 글을 쓸수록 강렬하게 인지합니다. 한 번뿐인 삶, 다시없을 오늘을.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어요. 파란 하늘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 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 그리고 이 문장을 바라보는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해요. 지금 내 마음에는 광활한 하늘과 드넓은 바다, 거센 바람을 타는 새, 비바람에도 한자리에서 다만 흔들리는 나무가 있습니다. 단 한 사람, 당신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지키며 언제고 당도할 안부를 기다리겠습니다.
초판 발행 날짜는 2013년 12월 24일. 무척 추운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원도처럼 혼자였고 간절하게 기억을 헤집으며 갈등했다. 나는 왜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고 말해도 되는가,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가 질문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따라가며 소설을 쓴다. 계속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초고를 쓸 때 파일명은 ‘원도’였다. 출간하면서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당시 출판사가 그 제목을 원했다.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으나 반대하고 싶었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문장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공포였으니까. 책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끊임없이 질문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원도’를 원하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전문가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출간 후 책장 구석진 곳에 책을 꽂아두고 다시 펼쳐보지 않았다. 내 안에 들끓던 무서운 질문을 소설로 써서 전부 버렸다고 믿었다. 내겐 다른 이야기가 필요했다. 겨울은 끝나고, 또 다른 겨울이 도래하고, 쉼 없이 글을 쓰던 2018년 어느 날, 절판을 요청하는 메일을 출판사에 보냈다. 출판사 내부 사정과 개인적인 이유가 맞물렸다. 그렇게 이 소설은 초판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다.
몇 년 전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의 그 책이 온라인 서점의 중고책 시장에서 정가의 서너 배 넘는 가격으로 판매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겨울밤 어둠 속에서 홀로 스러져가는 원도처럼 고요하게 잊힐 줄 알았는데…… 대체…… 왜……? 극소수일지라도 원도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문득 무서워졌다. 써서 버렸다는 믿음은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질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개정판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십여 년 전에 쓴 나의 글을 다시 읽는 데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나조차 외면하고 있는 ‘원도’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에게. 책장 구석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책 속에는 십여 년 전 책갈피 삼아 만들었던 빳빳한 종이가 있었다. 그것에 다음의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바로 나의 관심의 전부다.
- 《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책세상)
소설을 쓰던 당시 골몰한 주제일 텐데, 그 또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 속 문장처럼 ‘느닷없이 벽을 뚫고 튀어나오는 주먹’ 같은 ‘그 안에 꽃잎이 있을지 잘린 혀가 있을지 터진 눈알이 있을지 다이아몬드가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기억들. 그래서 나는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때 내 대답은 기억에 없다. 지금 내 대답은 ‘그럴 수 없다’.
제목에 관하여, 십여 년 전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나는 본래 제목을 유지하길 원했고 출판사에서는 ‘원도’라는 제목을 원했다. 초판과 개정판이 별 차이 없으므로 원제를 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원제를 바꾸는 행위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선택했을 극소수의 초판 독자에게 서운함을 주지 않을까 우려도 됐다.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이 꽤 파격적이며 심지어 멋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질문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이다. 두렵지만 피하고 싶진 않을 만큼. 하지만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를 원하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십여 년 전의 파일명을 되찾았다.
어쨌든 나에겐 사랑이 필요하다는 호소. 그것을 전하려고 계속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가’라는 문장은 ‘이렇게 계속 사랑해도 되는가’라는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핍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넘쳐흘렀다.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흐르는 그것을 잠시라도 막아서 내 안에 가두어보자는 안간힘이었는지도. 이 소설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그때 원도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다음 질문으로 건너갈 수 있었음을.
(…) 초판을 읽어주신 분들, 중고책을 찾아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도 저는 소통의 불가능과 타인의 몰이해를 생각합니다. 더는 믿지 않고 그저 생각합니다. 질문을 따라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그 길 위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길.
글을 쓰는 동안 오직 소설 속 인물만을 생각하는 시간이 소중했다. 그런 시간을 보낸 뒤에는 나란 인간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이번에도 달라지고 싶었다. 좁은 방을 맴도는 걸 멈추고 다시 의자에 앉으며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조금만 더 친해지자고.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