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미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난 그들에게서 강한 에너지를 느낀다. 추운 겨울날 강가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촬영하는 그들의 열정은 이미 아마추어를 벗어난 경지에 이른다. 어쩌면 사진을 작업으로 삼는 프로 사진가들에게선 쉽게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인내와 열정이 그들에겐 넘쳐난다. 또한 그들이 찍은 사진들은 여느 프로들 보다 더 훌륭하고 멋진 것들이 많다.
이번에 같이 작업한 이 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진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 프로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책을 내고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것은 사진에 대한 끝없는 노력과 쉼 없는 열정 때문이다."사진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 이라고 말하는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내 삶을 풍요롭게 했다. 자칫 놓쳐버릴 것 같았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면 카메라를 집어 들고 사진을 찍으러 거리를 나섰다. 그렇게 15년이란 세월을 사진에 묻혀서 살아왔다. 힘겹게 찍은 필름들을 붙잡고 밤새워 인화하는 매력에 묻혀 살아야 했다. 그렇게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진의 기술과 사진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어갔다. 선택은 언제나 내 몫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사진은 이제 나에게 선택이 아닌 삶이다. 사진을 제외한 내 삶은 결국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난 내가 선택한 운명과도 같은 사진과 여행에 나머지 삶을 투자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제 겨우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사진과 여행의 매력에 나를 던져놓을 생각이다.
이번 책은 저의 열 번째 책입니다. 책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돌아봅니다. 참 많은 시간을 걸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왔던 길보다 더 많은 길을 떠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책을 통해 여행과 사진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도전이 되길 소망합니다.
나에게있어 여행은 늘 설레임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 난 또다른 나를 만나고 또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행복합니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힘에겨운 배낭을 짊어져도 내 몸은 피로를 느끼지 않습니다. 길가에 놓여있는 허접한 나무의자에서 휴식을 느끼고 떠다른 곳으로 떠남을 생각합니다.
여행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곳에 내가 있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럼면애서 머문자리는 거창한 곳의 모습을 기대하는 분들에겐 실망스런 책입니다. 내가 떠나서 만난 여행은 그저 작은 설래임의 감동입니다. 오늘도, 나는 여행을 꿈꾸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정리합니다.
(2003년 5월 17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
2008년 처음으로 에티오피아를 만났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면서 느꼈던 그 날의 기억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토록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저장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런 정보도 없이 찾았던 이곳에서 나는 사진가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날 이후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나는 이 나라를 17번 방문했다.
17번의 여행에서 카메라가 우선인 적은 많지 않다. 그냥 이 나라가 좋았고, 이 나라 사람들이 좋아서 이 땅을 탐닉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채로 사람들과 커피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시골에서 그들이 내어주는 커피 한 잔이 소중했고 감사했다. 이들에게 커피는 삶의 중심이고, 나에게 커피는 이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대상은 화려한 풍광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나라. 새로움 보다 익숙한 과거를 만날 때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나라. 낯설지 않은 것들로부터 오는 편안함. 왠지 다른 세상의 나를 만나듯 에티오피아에서 보냈던 낯선 시간들이 편안했다. 에티오피아의 풍광과 내가 만난 사람들로 인해 내 안의 고정관념들이 깨어지기 시작했고, 그 순간 카메라는 심장소리와 함께 요동쳤다.
나에게 에티오피아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다. 그 아름다운 풍광과 사람들을 10년에 걸친 작업으로 세상에 내어놓게 됐다. 묵묵히 걸어온 길 만큼이나 심장이 뛰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사진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란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듯 딴 짓을 한다. 마음은 바쁘고 시간은 없는데 딴 짓을 한다. 에티오피아 10년의 기록을 준비하면서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수없이 많은 생각과 결정, 그리고 포기.
사진을 한다는 것이 세월이 지날수록 어렵다. 한 장의 사진을 선정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 그래서 자꾸만 그 긴장감에서 벗어나려 딴 짓을 한다. 바쁜 와중에 하지 않아도 좋을 청소를 하고, 짧은 여행을 떠난다. 떠나 있어도 생각은 온통 전시와 출판에 대한 생각뿐인데 탈출하듯 거리를 배회한다. 매번 이렇게 전시를 준비하는 시간들이 고통이며 희열이다.
사진은 특별한 장면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의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사진이다. 내가 걸었던 길. 내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 마신 커피 한 잔. 정성스럽게 볶은 커피를 기꺼이 나눠준 사람들. 내가 추구한 이 평범한 에티오피아의 일상이 누군가에겐 오래도록 깊은 여운으로 간직되길 바란다.
자극적이거나 특별한 장면이 없어도 좋은 그런 사진들이 분명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사진 한 장은 찍는 순간부터 이번에 세상에 내어놓기까지 내 심장을 울렸다. 사진을 찍고 2년이 되어서야 난 그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만난 이른 아침의 그 길과 사람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이들의 일상이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서는 사람들의 뒷모습과 끝없이 펼쳐진 길. 그 길에서 카메라를 들고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사진 한 장은 나에게 2년 동안 사랑이었고 개봉하지 않은 귀한 선물이었다. 그런 사진을 이번 기회에 보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느낀 그 날의 감정과 같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보다 더한 감동을 받는 이들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군가 질문을 한다.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어떤 사진인가요?” 그동안 나는 이 질문에 단 한 번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었으면서도 자신 있게 내어놓지 못했던 나만의 사진 한 장. 그러나 나에게 그런 사진이 생겼다. 좋은 사진이란 결과도 중요하지만 촬영하는 순간의 감동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결과도 좋으면 좋겠지만 현장에서 셔터를 누르던 그 날의 감정이 복받쳐 올 정도라면 사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다. 내 마음에 이미 그 순간의 모든 컷들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마음속에 저장된 사진들. 그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다. 나에게 그런 사진 한 장이 남겨졌다는 건 축복이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에티오피아 땅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작가에겐 축복이다. 모든 시간을 사랑으로 받아들였기에 10년 동안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내가 만난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풍광, 그들의 문화를 이번 전시와 사진집을 통해 알리고 싶다. 애티오피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 작업노트
2008년 처음 에티오피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8년 동안 10번에 걸쳐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나는 왜 에티오피아에 마음을 빼앗긴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굳이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처음 이 땅에 도착했을 때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졌다. 여기가 과연 아프리카인가? 내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가 맞는가?라는 질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가 갖고 있는 유구한 역사와 문화는 다른 아프리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프리카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를 만큼 무수히 많은 기독교 유적들. 왜 나는 아프리카는 기독교 종교와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프리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해봐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매스컴을 통해 알고 있던 아프리카는 지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아프리카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함께 에티오피아를 여행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던 말은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선이 동정이 아닌 동경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이 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였다. 경제적으로는 부족해도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 어쩌면 나는 그 미소 때문에 이 땅에 그리움을 묻어둔 것일지도 모른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참전했던 나라. 그래서 이들은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들을 형제의 나라라고 여기고 있을까?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6.25 때 참전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선한 미소와 친절은 이 나라 사람들의 심성을 알게 해준다. 낯선 이방인에게 손을 흔들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에티오피아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나라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나와 맺어진 소중한 인연들은 여전히 나에게 이 땅을 그리워하게 하는 힘이다.
몇 년 전 커피로 유명한 예가체프를 여행했다. 예가체프에 가기 위해서는 딜라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딜라 지역을 지나면서 길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한글 간판. 쓰여진 이름이 한별학교였다. 낯선 지방에서 만난 그 한글 간판이 마음에 남아 에티오피아 한인들에게 학교에 대해 물었다. 한국 선교사 부부가 운영하는 학교라는 대답을 들었다. 엄청 고생하면서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그 이후에도 두 번 정도 나는 예가체프를 가면서 그곳을 지나쳤다. 아직 특별한 인연이 없어 선뜻 방문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밀알복지재단과 인연이 되어 학교를 방문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놀라웠다. 에티오피아의 여러 학교들을 방문했지만 한별학교처럼 잘 정돈된 학교를 본 적이 없었다. 학교의 규모도 학생들의 모습도 다른 학교에 볼 수 없었던 느낌이었다. 정순자 교장 선생님과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왜 이 땅에 학교를 하려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존경스럽다. 적지 않은 연세에 부부가 이 땅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내가 이곳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별학교에서 사진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파인더로 세상을 봤다. 처음으로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아이들의 손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세상을 보는 그 눈빛과 카메라가 하나가 될 때 또 하나의 세상이 보인다. 사진반 마지막 수업으로 학교 근처 형편이 어려운 집들을 찾아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시킨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데, 코끝이 찡해져온다. 사진을 촬영하고 그 자리에서 출력해 액자에 넣어 선물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진을 찍고 선물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상기되어있음을 느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아이들에게 소감을 물었는데, 한결 같은 대답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선물을 한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는 것이다. 8명의 사진반 학생들과 함께 한 시간은 나에게 가장 좋은 추억을 선물했다.
100명의 학생들에게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나눠줬다. 그리고 자유롭게 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학생들이 촬영한 사진을 가져와 현상을 했다. 사진을 보는 내내 놀라운 장면들이 담긴 사진을 많이 접했다. 어쩌면 아이들이기 때문에 찍을 수 있는 사진, 그 사진은 놀라울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카메라를 처음 접해본 아이들이 보는 세상, 그 세상을 함께 보면서 사진이 주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한별학교에서 여러 방면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한별학교가 갖는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살기조차 어려운 척박한 땅 위에 학교를 세우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가 이 땅에 뿌려졌을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한별학교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전 벌써 10년이란 시간을 에티오피아에서 보냈고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이 학교가 없으니까 안 가고 그냥 노는 거예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애들을 위한 학교를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 정순자 교장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아름답게 자리한 한별학교. 2005년 160명의 아이들과 유치원으로 시작한 한별학교가 지금은 유치원생 372명, 초등학생 314명, 중학생 211명, 그리고 고등학생 199명이다. 한별학교는 이제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의 꿈을 책임지는 에티오피아의 명문학교로 거듭났다. 그 아름다운 그림을 힘겹게 그리며 헌신해온 두 분의 삶을 존경한다. - 작업노트
서해 5도를 촬영하면서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지?’ 가슴속으로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해야만 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동안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질문들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편하게 여행하며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이번 촬영은 개인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과 잔잔한 바다의 아름다운 컬러를 보면서도 마냥 행복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가 만질 수 없는 아쉬움은 또 다른 아픔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분명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 만큼 이 땅은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바다를 웅시하는 해병의 눈빛에서 나는 이 시대의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빛나는 웃음을 보여준 그들의 밝은 미소가 왜 그렇게 슬프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11월 23일은 촬영차 떠난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내가 공항에 도착하기 바로 몇 십분 전에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공격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과 두 달 전에 나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
아프다……. 진정 가슴이 아프다. 지금도 눈에 선한 그들의 빛나는 미소가 떠올라서 더 아프다. 내 카메라를 향해 장난스럽게 미소를 던지던 그 천진난만한 젊음들이 생각나서 아프다.
“해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잠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갈 뿐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의 죽음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아프다.
짧은 글로 대신할 수밖에 없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붉은 명찰 해병대원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전쟁 없는 곳에서 편안히 잠드시길…….”
- 프롤로그 중에서
선택은 언제나 내 몫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사진은 이제 나에게 선택이 아닌 삶이다.
사진을 제외한 내 삶은 결국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난 내가 선택한 운명과도 같은 사진과 여행에 나머지 삶을 투자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제 겨우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사진과 여행의 매력에 나를 던져놓을 생각이다.
나만이 느끼는 사진이 아닌 모두가 공감하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다.
욕심이라면 모두가 보고 행복해지는 그런 사진을...
사진이란 정의를 먼저 깨치기 전에 여행에 빠져 세상 속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떠돌아다닌 내 외로운 여행이 또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난 행복할 수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길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안부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안부를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다시 전하며 살아가리라.
이번 책은 내가 만난 사람들과 나를 안아준 자연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다.
그 감격적인 만남이 이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부시맨
1983년 11월은 영화 ‘부시맨’을 통해 내 마음에 부시맨이 들어온 때이다. 그때부터 이상하리만치 부시맨에 대한 생각이 항상 내 안에 존재했다. 언젠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 그들이 내 마음에 운명적으로 들어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2008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우연한 기회에 부시맨을 만날 수 있었다. 내 마음 속에 오랜 시간 동안 자리 잡았던 그 부시맨을 처음 만났고 그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부시맨을 처음 만난 이후 11년 만에 나는 나미비아에 있는 부시맨들을 찾아 떠났다.
산(부시맨)은 남부 아프리카의 가장 오래된 주민으로 적어도 2만 년 동안 살아왔다. 산(San)의 또 다른 이름인 부시맨은 ‘도적’ 또는 ‘무법자’를 의미하는 네덜란드어 ‘bossiesman’에서 유래하였다. 이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이 유럽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실제로 도적 또는 무법자라 불리워야 할 사람들은 이들의 삶을 짓밟고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살지 못하게 몰아낸 유럽인들일 것이다.
98,200명. 현재 보츠와나,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앙골라, 짐바브웨에 살고 있는 부시맨의 숫자다. 결국 지구상에 남아 있는 부시맨이 10만 명이 되지 않는 다는 뜻이다. 그중 내가 만난 부시맨들은 나미비아 정부가 지정해준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조상이 살아왔던 방식이 아닌 정부가 정해 놓은 방식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칼라하리 사막과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며 사냥을 천직으로 이어온 사람들, 그들에게 사냥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부시맨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한 것은 부시맨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지워버린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에서 2만 년 이상을 살아온 그들을 더 이상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살 수 없게 한다면 그들의 독특한 사회와 생활 방식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다. 자신들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이어왔던 사람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욕심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라고 믿는다. 이제 이들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제껏 수렵 · 채집인으로 살아온 산(San)에게는 칼라하리 사막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부시맨들은 관광객과 다이아몬드 채굴을 위해 조상의 땅에서 강제로 이주 당했을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다. 그들에게 사냥을 금지한 땅에서는 부유한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동물사냥이 이뤄지고 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유희와 쾌락을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다. 자본에 굴복한 아프리카 각국 정부의 정책은 그 땅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사실 부시맨의 사냥방식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작은 임팔라 한 마리를 사냥하면 온 가족이 한 달 가까이 생활할 수 있어요!”라고. 전통 방식으로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그들에 의해 동물들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 개의 나라에 걸쳐 살아가는, 10만 명도 채 안되는 적은 종족수로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아프리카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자연에 가까운 그들의 삶이 가장 아프리카다운 것이다. 오히려 관광으로 불러들이는 헌터들에 의해 사냥되는 동물들의 죽음이 더 위험하고 잔인하다.
부시맨들은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며 살아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 내려오던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그들은 그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보호구역이라는 틀 안에 가둬졌다.
인간이 인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이들을 몰아내고 그들에게 알량한 선심이라도 쓰는 양 몇 푼의 보조금을 쥐어주며 그들을 울타리 안에 몰아넣고 통제하여서는 안 된다.
척박한 사막에서 만난 부시맨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그들의 독특한 외모, 처음 들어보는 언어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들만의 혼이 담겨 있는 듯한 춤.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지?’라는 끝없는 물음을 던져야 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것처럼 내 앞에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려 애쓰는 그들에게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흥겨운 노래와 춤을 보는데도 나에게 왜 그렇게 슬픔이 먼저 스며들었던 걸까? 그들의 손짓과 발동작 하나하나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춤은 몸으로 하는 언어이자 대화였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춤 ‘기린이 나타났다’를 보면서 춤으로 동물을 표현하는 동작들에 심취했다. 이들에게 춤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에게 수없이 많은 의문을 던졌던 이들과의 첫 만남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특별하다고 느꼈던 시간이었다.
예정에 없던 가족사진 촬영을 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 카메라 앞에 자신들의 모습을 맡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치장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게 온전히 자신들의 모든 것을 맡긴 시간이었다. 현상되어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던 사람들. 사진을 찍는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사람들과의 간격에 대해 물음표를 던져야 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12년을 마음으로 준비해왔다. 그리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방식으로 선물을 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은 나에게, 그리고 이들에게 작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다음 해 다시 한 번 그들을 만나러 갔다. 마음의 짐으로 남겨뒀던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족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나에게 다가와 도움을 청하던 청년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찾은 그들에게 약속했던 자전거 30대를 선물했다. 고백하자면 그 청년은 나에게 한 대의 자전거를 부탁했었다. 어쩌면 많은 수의 자전거를 원한 것보다 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그 한 대의 자전거가 이들에게 이토록 소중한 거였구나. 자전거를 전달하는 날 그들은 나에게 춤으로 화답했다. 그들이 나에게 몸과 마음으로 주는 선물은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선물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부족, 자유로운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어놓는다. 부디 이번 사진전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의 문이 열리길 간절히 바란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평등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2년 동안의 마음의 긴 여행을 이번 전시를 통해 세상에 선보일 수 있어 다행이다. 마음에 쌓아두었던 그들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라도 풀 수 있어서 감사하다. - 작업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