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차별과 정치적 부당함을 이야기했으며,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말한 시인, 빈센트 밀레이의 시가 시인 최승자의 섬세한 번역으로 출간됐다. 밀레이 사후 출간된 《시 선집(Collected Poems)》을 토대로 최승자 시인이 직접 일부 시들을 재구성하고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된 시집으로, 출간 후 한국 독자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오래전에 절판되었다.
삶에 대해 깊은 울림을 주는 시인의 언어를 다시 세상에 알리고자 읻다 출판사가 재출간을 결정하였으며, 최승자 시인이 다시금 구성 및 번역 상태를 확인하고,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를 쓰고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의 책을 번역한 서대경 시인이 원문을 감수해 다시 태어났다. 이 시집을 기다린 독자에게 겨울 선물이 될 복간 소식을 전한다.
“나를 읽어다오, 나를 죽지 않게 해다오!” - <시인과 그의 책>
나를 읽어다오, 나를 죽지 않게 해다오!
희미해진 글자들을 뒤적이면서,
찢어진 장정 속에서 한때 나였던
모든 것이 불변으로 남아 있음을 발견해다오!
-〈시인과 그의 책〉중에서
삶은 계속되어야 해,
그리고 죽은 자는 잊혀야 해.
삶은 계속되어야 해,
착한 사람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앤, 아침밥을 먹어라.
댄, 네 약을 먹어라.
삶은 계속되어야 해.
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
-〈비가〉중에서
높은 언덕 꼭대기 밑에다
조그만 선술집을 차려야지
그 안에서 모든 회색 눈 가진 사람들
앉아 쉴 수 있도록.
-〈선술집〉중에서
너 죽어 땅속에 있을 때에도
장미와 진달래는 피어 있을 것이다.
그때에도 여전히, 벌들로 무거워진
흰 라일락으로부터 햇빛 밝은 소리가 들리고
-〈죽음의 엘레지〉 중에서
사랑은 날 남겨두고 가버렸다. 하루하루가 똑같다.
나는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잠을 잘 것이다 ㅡ 지금이 그 날 밤이라면 좋을텐데!
그러나 아!ㅡ 누운 채 뜬눈으로 느릿느릿 시계 치는 소리를 듣는다는 건!
다시 낮이 되었으면!ㅡ 새벽이 가까웠으면!
-〈삶의 재〉 중에서
<죽음의 엘레지>포함 국내도서 2만원 이상 구매 시, 읻다 돌 키링
다른 언어로 쓰인 ‘시’를 번역한다는 건 어떤 문학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시를 잘 몰라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과, 초점이 맞춰진 순간과, 행간의 리듬을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 이 책이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었으며, 작가와 텍스트와 번역가로 이어지는 흐름을 오랜만에 깊이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낯선 시인의 시를 익숙한 시인이 이어준다. 게다가 둘의 ‘케미’가 너무 좋다는 게 느껴진다. 조금 든든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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